문서진의 개인전에 관해 쓰고자 했을 때 나는 꽤 오래 머뭇거렸다. 전시장에서 섬세한 설치와 감정의 경로를 따라가는 조각과 사물의 배치에 감격하며 보았지만 글로 남겨지기를 머뭇거린다. 파운드 오브제, 책을 받치고 있는 지지체의 가구, 사물들은 어떤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관객이 만져볼 수 있는 사물은 어떠한 것에 접촉하기를 촉구한다.
그의 앞선 작업을 살펴보자. 문서진은 미국에 있는 한 마을에서 레지던시 생활을 하면서 매일 눈을 쌓아 섬을 만들고 겨울이 지나 봄이 오면 점차 사라지는 섬을 기록하는 〈살아있는 섬〉(2020)을 진행한다. 섬, 눈 덩어리는 애써 쌓아 올렸지만 곧 사라질 것을 약속한 물질이며 자연의 시간이었다. 이렇게 우연, 시간의 개입에 따른 물질의 변형은 물질을 다루는 그에게 있어 수용되어야 하는 조건이었다. 섬을 쌓는 동안 작가는 그 자신을 매서운 추위와 호수 위라는 아슬아슬한 상황에 노출시킨다. 그는 얼려진 호수 위의 지반을 걱정하면서 죽을지도 모르는 두려움에 사로잡히면서도 풍경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는 역설적인 상황에 놓이며 죽음이 잠재된 상태에도 즐겁고 좋은 순간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작가는 이 작업이 “삶에 대한 은유”➀ 로 다가왔다고 말한다.
삶에 대한 은유, 그의 작업으로 진입하는 적극적인 열쇳말이다. 그가 조각하는 것, 행위하는 것은 ‘나’를 둘러싼 세계와 삶의 질감에 충실히 다가가는 것일 수 있겠다. 삶과 그것을 “살아낸 시간”➁은 그의 작업 중심에 서 있다. 그가 조각을 하건, 퍼포먼스를 하건, 텍스트를 쓰든 간에 매체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중심에 몸이 겪었던 시간과 그 시간이 만들어내는 한 몸의 고유함, 그리고 현재에 그것이 다시 조형되며 발생하는 조각이라는 몸이 있다.
이번 전시 《맨질맨질하고 딱딱한 삶에 대한》에서 문서진은 어린 시절 할머니와의 생활을 떠올리며 촉감으로 기억하는 이정자 할머니에 대해 말한다. 그는 살결의 질감으로 한 사람의 존재를 기억해 낸다. 그에게 할머니는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게 많이 없을 뿐더러 매일듣는 일상의 언어만으로 남겨져 있는 존재이자 생활의 부대낌으로 드러나는 존재이다. 그래서 문서진은 할머니가 살아온 일대기라던지 알려지지 않은 서사로부터 출발하여 존재를 인지했던 감각, 접촉했던 촉감에 의존해보기로한다.
〈그의 침묵: 죽은 사람과의 대화〉(2022)는 할머니가 했던 말을 더듬어 기록하고, 누군가가 대신 전해준 할머니 이야기에 대한 단편을 보여주고자 축 늘어뜨린 책의 형태로 넘겨보게 만들고 그것을 관객이 앉아 천천히 살펴보도록 나무로 된 가구로 구성했다. 이정자 할머니의 이야기가 담긴 책-조각은 할머니가 말한 것을 작가가 대신 써 내려갔고, 정확하지 않은 기억에 의존하여 할머니에 대한 증언과 기록을 ‘듯하다’, ‘아마’라는 문장으로 파편적인 서사를 만들어 나간다.
이 작업은 이정자 할머니에 대해 어떤 것도 제대로 알 수 없지만 작가의 생애와 접촉된 파편의 기억으로 이정자 할머니를 더듬더듬 찾아간다. 깎아 놓은 갈변한 사과를 싫어했던 것, 생리를 시작할 때 내비쳤던 할머니의 그 시절, 누군가의 딸로 외로웠던 것. 작가가 어린 시절 겪은 할머니와 부대낌의 장면과 그가 무심코 했던 말이 적혀진 페이지는 한 개인을 심상으로 조형해낸다. 그것은 누군가의 가족을 떠올릴만한 보편의 언어를 담고 있지만 구체적인 인물의 모습을 담아내면서 고유한 삶의 모양을 가진 ‘이정자 할머니’를 그려낸다.
문서진의 작업에서 언어는 그의 작업으로 깊숙이 들어와 접촉하기를 유도하는 버튼과도 같다. 그것은 머리와 꼬리가 있는 서사가 아니라 그가 기억하는 촉감에 따라 쓰인 글이지만 관객은 스스로 자신의 심상으로 조형하며 그가 마련한 접촉의 순간을 향해간다. 나무 의자 위에서 관객인 나는 페이지를 넘기며 나의 엄마와 할머니를 떠올렸고, 그들은 누가 기록하고 기억해줄까 하던 사념 내지는 애상으로 가득 차다가도 여기 존재하는 내가 기억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지기도 하며, 삶의 애틋한 대상이 겹치는 순간을 경험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앉을 이 빈자리는 고유의 경험을 다른 이의 경험으로 이어지고 마주하게 하는 순간을 위한 접촉을 기다리는 자리일 것이다.
친밀한 존재를 기억하는 것은 부분적이며 촉감적인 일이다. 〈그의 침묵: 그의 말〉(2022)은 할머니가 했던 말을 종이에 압인하여 새겼다. 얄부리한 종이는 물에 젖었다가 마르면서 그 재질이 바스락대기보다 천처럼 퍼슬퍼슬한 질감이 되어 살의 질감과 가까워진다. “밥 먹어”, “일어나라”, “왜 그래, 응”의 말들이 쓰여진 것이 아니라 접촉되어 새겨진 종이라는 것, 그래서 더미를 넘기고 만지는 것은 어쩐지 세월이 쌓아온 늙은 사람의 신체, 그리고 신체적인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내가 이 전시의 글을 쓰면서 조각 자체로 다가갈 수 없고 서사 자체로도 전부가 아니었기에 그의 작업이 향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의문에 빠졌던 것은 어떤 것에 닿기를 위해 향하고 있는 그 움직임 때문은 아니었을까 싶다. 장 뤽 낭시는 글쓰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글쓰기’는 어떤 기호작용에 의한 명시나 증명이 아니라 의미와 닿기 위한 제스처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터치이고 접촉이되 일종의 건넴인 그것. 글을 쓰는 사람은 잡거나 손에 쥐는 방식을 통해 접촉하지 않는다. 그는 바깥과의 접촉을 향해 달아나고 거리를 만들고 사이를 내는 모든 것들과의 접촉을 향해 스스로를 건네고 또 보낸다. 글쓰는 자의 접촉은―그것이 분명 그 자신의 접촉임에도―물러서고 간격을 만들고 거리를 내는 원칙 속에 이루어진다.”➂
여기서 글쓰기는 그의 작업을 빗대어 말하는 것이지만 그의 작업이 비로소 글쓰기의 행위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문서진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그 언어를 쓰는 방식을 하나의 몸에서 또 다른 몸으로 보내려 한다. 그런 점에서 그의 글쓰기의 방식은 다른 몸들로 건네질 수 있는 촉감의 언어이다. 이정자 할머니를 거리에 두고 그의 고유한 삶과 존재를 얼마 없는 단서들로 감각하려는 방식은 도래할 관객에게 그 감각의 경험을 다시 건네어 준다.
맥락과 기호로 읽히는 통상의 언어를 벗어나 있으며 말없음이 이정자 할머니의 존재를 드러내듯 부재와 침묵도 이러한 종류의 언어에 속한다. 낭시가 말한 글쓰기를 인용해 말하자면 문서진의 작업은 접촉을 향하는 쓰기의 수행이다. 그가 〈비우기: 몸으로〉(2018)에서 텍스트에서 출발하지만, 몸으로 그것을 다시 지워내는 ‘반-언어적’➃인 것을 향하듯 이 쓰기의 과정은 그 출발점이 언어이지만 몸의 자리로 채워져 촉감으로 발생하는 언어를 향한다.
이쯤에서 연상되는 작업 〈전화번호부〉는 이정자 할머니가 기록한 전화번호부에서 가져온 글씨체를 도장처럼 찍을 수 있도록 알루미늄 활자를 만들고 벽에 비뚤비뚤하게 활자를 박아 관객이 만질 수 있게 했다. 부분의 활자는 할머니의 고유한 글씨가 체현된 글자이면서 아직 찍혀지지 않았지만 “만져지길 기다리는 사물”➄로 언제가 될지 모르는 촉감의 순간을 담고 있다. 아직 만져지지 않은 이 글자이자 물질은 누군가 또 다른 자신의 신체적 기억과 닿기를 기다리는 시간, 미래에 접촉할 순간인 “조각적인 순간”➅에 열려있다. 조금 섣부르게 말하자면, 문서진은 조각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가기 위해 글을 쓰고 접촉을 야기하는 사물들을 만들어낸다.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할머니에게 건네는 말처럼 보이는 일부 작업의 제목들은 묵혔던 감정과 세월이 지나고 나니 풀렸던 ‘당신’에 대한 이해를 내비치며, 할머니와 ‘나’의 시간을 포개어 놓는다. 당신을 만든 당신의 삶의 시간과 먼 미래에서 올 나의 몸의 시간을 예견한다. “당신과 나는 여전히 어리고 이미 늙었어”라고. 그들의 시간은 서서히 빛이 바랜 고체 모기향처럼 사건이 일어나고 점점 소멸하는 사물을 닮았다(〈당신과 나는 여전히 어리고 이미 늙었어〉, 2022). 그러니 사물은 ‘당신’과 ‘내’가 하는 대화(접촉)의 장소이면서 조각적인 순간이 발생하는 자리이다.
할머니라는 먼 몸은 ‘나’의 신체의 기억으로 돌아와 그 침묵 같던 존재는 ‘나’에게 계승된다. 몸에서 몸으로 계승될 수밖에 없는 할머니라는 존재를 써 내려가는 동시에 육체를 가지고 조각하는 ‘나’는 도래할 다른 몸에게 이를 전하기 위해 이 경험에 다시금 거리를 둔다. 따라서 조각의 행위는 할머니라는 대상을 향해 가고 또 멀어지는 수행을 반복할 때 가능해진다. 문서진이 ‘이정자 할머니’를 조형해내고자 했던 이러한 수행의 반복은 그가 말한 조각적인 순간에 가까워지려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조각적인 것에 대한 수행을 은유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먼 거리의 몸에 다가가고자 했던 감각을 향하는 글쓰기는 문서진이 접촉된, 접촉될 가능성의 사물을 만들기 위한 수행이었다. 몸 부대낌의 대상에게 가닿으려 했지만 닿기에는 침묵으로 가득하고 그렇지만 그 자리에 있었던 ‘당신’의 삶의 모양을 몸으로 쓴 언어로 구현하고 조각적인 순간이 도래하기를 유도하는 일은 “그 어딘가에 있을 조각”➆을 향하는 작가의 부단한 몸짓일지도 모르겠다.
➀ 금천예술공장 작가 인터뷰 영상 참조. https://youtu.be/2ABrW-TUFIk
➁ 유은순, 「늙음, 부재, 사랑」, 문서진 개인전 도록, 파킹페이지프레스, 2023, p. 3.
➂ 장-뤽 낭시, 『코르푸스-몸, 가장 멀리서 오는 지금 여기』, 김예령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2, p.21.
➃ 작가 노트 참조.
➄ 문서진과의 대화, 2023.1.15.
➅ 작가는 조각이라는 것은 어떤 순간으로 있는 것, 그것을 “조각적인 순간”이라고 말하며, 조각이 된다는 것은 몸의 부대낌, 사물을 만졌을 때의 순간들, 몸에 의한 것이라고 언급한다. 그렇기에 만져짐을 기다리는 사물들, 그리고 조각적인 순간을 떠올리며 작업을 한다고 말한다. 문서진과의 대화, 2023.1.15.
➆ 문서진과의 대화, 2023.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