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 아침(Aatchim)이라는 활동명으로도 알려진 작가 김조은(b. 1989)은 투명한 비단 천을 활용하여 기억과 감정의 레이어를 겹겹이 쌓아 표현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작가는 다층적인 화면을 구축하는 회화적 수행을 통해 고통, 돌봄, 사랑 등 복합적인 개인사에 기반을 둔 기억을 가시화한다.


《eye jailed eye》 전시 전경(Vacation Gallery, 2019) ©아침 김조은

김조은은 태어날 때부터 한쪽 눈이 다른 쪽 눈과 맞지 않는 간헐적 사시를 가지고 있었다. 2008년 작가는 시력 교정술을 받았지만 입체 시력은 회복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그는 잠시 붓을 내려놓고, 2010년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하며 그림이 아닌 연극 대본을 쓰거나, 책 제본소에서 일하는 등 샛길을 걸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약 9년 후, 작가는 ‘도전적인’ 작업을 찾아 헤매던 중 한국화를 접하게 되었고, 이는 다시 붓을 들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eye jailed eye》 전시 전경(Vacation Gallery, 2019) ©아침 김조은

2019년 뉴욕에서의 첫 번째 개인전 《eye jailed eye》는 시력 교정술 이후 다시 회화로 돌아온 작가의 여정을 보여주는 전시였다. 김조은은 고향에 계신 할머니와 어머니, 동생 등 기억 속 주변 여성들의 모습을 비단에 옮겼다.
 
이 작업에서 작가는 자신의 시각과 기억, 그리고 회화적 실천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며, 다층적인 복합성을 수반하는 기억들을 여러 겹의 회화적 층위로 표현하는 방식을 다룬다.


아침 김조은, 〈New Song〉, 2019, 비단에 미네랄 피그먼트, 27.9×35.6cm ©아침 김조은

간헐적 사시로 인한 시각적 경험은 그의 작업에 있어서 불편한 장애물이 아닌, 다층적인 화면 구성을 만들어 내는 특별한 시선으로 작용한다. 김조은은 남들과 다르게 세상을 감각해온 자신의 시각적 경험을 ‘새로운 양안시력’이라 지칭한다. 이는 기억과 관찰을 합쳐 장면을 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뚜렷한 사물의 형태가 아닌 겹쳐진 모습으로 드러나는 그의 회화는 작가의 시각적 경험이 반영되었을 뿐 아니라, 이를 통해 시간이 지나며 변화하는 기억의 특성, 대상에 얽힌 복합적인 감정과 기억의 분위기를 가시화한다.


《eye jailed eye》 전시 전경(Vacation Gallery, 2019) ©아침 김조은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하면서 김조은은 자신만의 규칙 두 가지를 정했다. 하나는 내가 본 것만을 그리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내가 기억하는 것만을 그리겠다는 것이었다.
 
전시 《eye jailed eye》에서 김조은은 그의 어머니를 주제로 한 그림들을 선보였다. 작업을 진행하면서 작가는 어머니의 우울증이 남긴 고통과 트라우마의 순환, 그리고 용서를 통한 해방에 대해 고찰하며, 과거의 기억을 다시 따라갔다.
 
과거의 기억과 감정을 반추하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그림은, 그가 보고 기억했던 것들을 솔직하게 드러냄으로써 그의 어머니,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이해와 용서의 제스처를 건넨다.  


아침 김조은, 〈Bail Mother Melancholy (eye jailed eye) I〉, 2019, 비단에 미네랄 피그먼트, 30.5×22.9cm ©아침 김조은

한편, 비단 천 위에 천연 안료를 사용하여 만들어진 그림의 환영적인 질감은 흐릿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기억의 반짝임과 실제로 본 것과 회상되는 것 사이의 간극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대상에 대한 작가의 친밀감을 드러낸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처음 본 것은 그 앞면만을 그릴 수 있지만 오래 지켜보며 잘 아는 대상일수록 모든 면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기에 친밀한 대상일수록 투명도가 높아진다고 한다. 여러 겹의 얇은 비단 천 위에 투명하게 그려진 기억의 장면들은 대상에 대한 표면적인 재현을 넘어, 그와 오랜 시간 형성해온 복합적인 관계의 층위를 담아낸다.


아침 김조은, 〈Unshoved (빼내다, 내 목에서 뼈를 꺼내는 엄마 위 생선요리)〉, 2021-2024, 목판 위 카제인 채색 위에 비단을 덧대고, 셸락에 현탁한 석채, 수채, 파스텔 연필, 호두 잉크, 면 리본, 46x60.5x4.5cm ©글래드스톤 갤러리

〈Unshoved(빼내다, 내 목에서 뼈를 꺼내는 엄마 위 생선요리)〉(2021-2024)라는 제목의 작품은 어머니에 대한 하나의 기억에 얽힌 두 장면을 이중구조를 통해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림의 앞 부분에는 생선 요리의 형상이, 뒤편에는 목에 걸린 생선 가시를 빼 주는 어머니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는 작가의 어린 시절 생선 요리를 먹다가 뼈가 목에 걸려 아파했을 때, 어머니가 손을 넣어 빼내어 주었던 기억을 그린 것으로, 오랜 시간이 지나도 머리와 마음 속에 자리해 있던 소중한 기억의 장면을 투명하고도 입체적으로 표현한다.


《사자굴  [Sajagul] — Then, out of the Den》 전시 전경(Make Room, 2022) ©아침 김조은

한편, 2022년 로스앤젤레스 Make Room에서 열린 개인전 《사자굴  [Sajagul] — Then, out of the Den》에서 김조은은 자신의 기억에 도전하는 일종의 게임을 시도하였다. 이 게임에서 작가의 말(words)는 곧 그의 말(token)이 되며, 시각적 기억의 정확성에 도전하고 그것을 현실로부터 분리하여 야생적인 상상으로 변형될 때까지 밀어붙였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드로잉과 회화를 통해 기억과 언어를 시각화하였다. 가령, 작업의 제목이기도 한 ‘사자굴’에서 ‘사자’는 동물을 의미하는 사자(獅子)와 죽은 이를 의미하는 사자(死者)를 오가는 단어로 사용되며, 그의 작업에서 비선형적인 시각 서사로 번역된다.


아침 김조은, 〈Deliver her— Like a Thief in the Night. We Heard of Lions, Above a Herd of Pianos.〉, 2022, 비단 위에 아교에 현탁한 광물 및 토양 안료, 정제된 송연묵, 인디고 염료, 목탄, 흑연, 분필, 화이트골드 리프, 88.9x66x0.6cm ©아침 김조은

작가는 또한 이 단어를 시각적 이미지로 번역하면서 영화 「쥬만지」(1995)의 특정 장면을 떠올렸다. 영화에서 사자가 등장해 꼬리로 먼지 쌓인 피아노 건반을 쓸어내리며 소음을 내고, 누나 주디는 동생 피터에게 “진짜가 아니야, 피터. 환각이야.”라고 말한다.
 
작가는 어린 시절 자매들과 수백 번 반복해서 보았던 이 장면이, 피아노 상점 위에서 살던 시절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부재했던 시기와 그 주변의 설명할 수 없는 일들과 직접적으로 겹쳐진다고 말한다.


아침 김조은, 〈Doubt The Hands (The Debt Collector Seeks the Father Through a Milk Delivery Hole)〉, 2022, 비단 위에 아교에 현탁한 광물 및 토양 안료, 정제된 송연묵, 목탄, 흑연, 분필, 88.9x127x3.2cm ©아침 김조은

이러한 이해할 수 없고 음울하며 환상적인 기억들을 그리기 위해, 작가는 건축적 세부와 특정 사물들로 이루어진 구체적인 공간을 먼저 그리고, 이후 가족을 그 공간 안으로 조심스럽게 불러들여 자신의 기억을 검토하고 그것과 대면한다.
 
이러한 방식은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된 기억술의 일종인 ‘기억의 궁전’ 개념을 착안한다. 이는 나에게 친숙한 공간을 상상한 다음, 외워야 할 목록을 그 공간에 그리고 동선을 외우는 방식으로, 기억 속 사물과 공간, 인물의 관계를 종합적으로 구축하는 그의 그림 구성과 닮아 있다.


아침 김조은, 〈A Safe Coffin — A Tale of a Tail, Out of the Blue. (Kinderszenen)〉, 2022, 비단 위에 아교에 현탁한 광물 및 토양 안료, 정제된 송연묵, 목탄, 흑연, 분필, 56.2x86.7x3.8cm ©아침 김조은

작가는 이 개념을 참고하기에 앞서 애초에 자신의 기억술이 ‘기억의 궁전’과 같다고 말한다. 극도로 생생한 정신적 이미지를 계속해서 떠올리는 ‘하이터판타지아(Hyperphantasia)’를 가지고 있는 그에게 기억이란 항상 섬광처럼 보이는, 현실처럼 생생하고 구체적인 장면이다.
 
그렇기에 작가는 공간에 대한 정보만 있으면 모든 것을 투명하게 그릴 수 있다. 이는 곧 회화라는 공간을 기억 속 장소에 얽힌 관계의 장면들과 말로 다 풀어낼 수 없는 미묘한 분위기를 복합적으로 담아내는 새로운 ‘기억의 궁전’으로 만든다.


《최소침습》 전시 전경(글래드스톤 갤러리, 2024) ©글래드스콘 갤러리

그리고 2024년 서울 글래드스톤 갤러리에서 김조은은 국내 첫 개인전 《최소침습》을 열었다. 전시 제목인 ‘최소침습’은 그 당시 외과수술을 받은 작가의 개인적 경험을 반영한다. 작가는 신체적 위해를 최소화하며 이루어지는 외과 수술인 ‘최소침습’을 통해 몸을 치료하며, 이 단어가 가진 의미를 자기 자신에 대입해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후 김조은은 ‘최소침습’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처럼 “최소한으로 자신을 드러내길 바라면서도 누군가의 기억에 강렬하게 남는” 사람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최소침습’ 프로젝트를 전개해 나가기 시작했다.


아침 김조은, 〈Next Time〉, 2024, 비단 위에 수채&파스텔, 월넛잉크, 화이트골드 리프, 황동 장식, 44.5x31.8x3.8cm ©아침 김조은

이 프로젝트는 한자의 뜻에 따라 ‘최最/소小/침侵/습襲’ 네 장으로 나뉜다. 귀국해 처음 선보이는 전시에서는 ‘작음’ ‘적음’ 등에 주목한, 그중 가장 아름다운 챕터인 ‘소小’만 펼쳤다.
 
전시 《최소침습》에서 선보인 작품들은 전적으로 직접적인 관찰과 개인적인 기억에서 비롯된다. 그는 이러한 기억을 미시적이고 분광(分光)적인 방식으로 해체함으로써 고통의 순간을 여러 관점에서 살펴보고, 몽환적이고 시적인 언어로 취약성에 대한 본능적 표현을 담아낸다.
 
우울함이 만연한 다수의 실크 작품에서는 종종 전경에 위치한 인물이 따뜻한 포옹의 제스처로 다른 이를 위로하는 연민 어린 장면이 펼쳐진다. 사소하지만 침습적인 방식으로 타인을 소중히 여기고자 하는 작가의 인생관처럼, 그림 속 인물들의 모습은 고통의 한 가운데서도 돌봄과 사랑의 제스처로써 타인을 보호하고 있다.


아침 김조은, 〈Smiles From Kloster Mariastein〉, 2024, 비단 위에 수채&파스텔, 월넛잉크, 화이트골드 리프, 황동 장식, 48.3x38.1x2.5cm ©아침 김조은

이처럼 자전적 진솔함이 깃든 김조은의 작업 속에서 과거와 현재는 중첩되고, 고통의 순간은 다정한 관찰의 시선을 통해 굴절되며, 인간의 기억과 관계의 복잡성은 새로운 시각 언어로 표현된다. 투명한 실크를 쌓으며 만들어진 화면은 사물, 공간, 인물과의 관계에 대한 초현실적인 기억을 담아내며, 작가 개인사에서 나아가 보는 이의 기억 속 깊은 곳에 침투해 소박하지만 다정한 위로의 손길을 내민다.

 "사람마다 감각하는 게 다른데도 우리는 마치 같은 걸 느끼는 것처럼 말하죠. 사실 아무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느끼는지는 몰라요. 누구의 감각도 고통도 섣불리 얘기할 수 없어요. 그래서 앞으로 ‘내가 기억하는 것, 내가 보는 것만을 갖고 작업을 할 거야’라고 생각했죠. 우리가 함께 한 기억을 ‘나는 이렇게 보고, 이렇게 기억했어’라고 솔직하게 보여주는 그림을 그렸어요."     (김조은, 경향신문 인터뷰 중) 


아침 김조은 작가. 사진: Roeg Cohen. ©글래드스톤 갤러리

김조은은 뉴욕 대학교에서 스튜디오 아트 학사 학위를,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시각 예술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현재 뉴욕 브루클린을 기반으로 활동 중이다. 개인전으로는 《최소침습》(글래드스톤 갤러리, 서울, 2024), 《Old Habit Theater》(Travasía Cuatro, 과달라하라, 멕시코, 2024), 《Sheer Painer》(François Ghebaly, 로스앤젤레스, 미국, 2023), 《사자굴 [Sajagul]—Then, out of the Den》(Make Room, 로스앤젤레스, 미국, 2022)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2025 타이베이 비엔날레 《Whispers on the Horizon》(타이베이 시립미술관, 타이베이, 2025-2026), 《To Bloom》(더페이지갤러리, 서울, 2025), 《The Land of Exile》(Aranya Art Center, 베이다이허, 중국, 2023), 《And the Moon Be Still as Bright》(Harpers Chelsea, 뉴욕, 미국, 2023), 《Durian On The Skin》(François Ghebaly, 로스앤젤레스, 미국, 2022), 《Machines of Desire》(Simon Lee, 런던, 2022)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김조은은 2023년 야도, 2021년 트라이앵글 아트 어소시에이션, 2021년 라이트하우스 워크스, 2019년 현대예술재단, 2018-20년 드로잉 센터 등에서 펠로우십을 받았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