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세진(b. 1988)은 일상 속에서 접한 풍경을 사진 이미지로 담아낸 뒤, 이를 다시 회화로 재구성한다. 작가는 사진을 해체하고 조합하는 과정을 통해 시간의 흐름과 변화의 흔적을 시각적으로 드러내고, 반복된 붓질로써 시간의 층위를 만들어 내어 어제의 풍경을 그제의 풍경으로 돌려놓는다.


권세진, 〈트로피〉, 2014, 종이에 채색, 591.6x211cm ©권세진

권세진은 전통 재료인 한지와 먹, 그리고 디지털 이미지라는 동시대적 재료를 사용하여 현재의 풍경을 담는다. 전통의 재료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그의 작업은 회화적 표현의 확장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캔버스가 아닌 종이라는 얇은 지지체를 사용하는 그는 먹을 머금은 붓이 종이에 닿을 때 번져 나가는 점을 이용한다. 이러한 방식은 작가의 의도에서 벗어나는 변수를 만들어 내기도 하며, 안료가 종이에 서서히 스며들면서 깊이와 공간감을 만들어 낸다.


권세진, 〈졸업〉, 2015, 종이에 채색, 148x211cm ©권세진

권세진의 작업은 전통 회화인 동양화의 소재가 되는 대상들이 지금의 시점에서 어떻게 그려질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하였다. 이때 그는 전통적 도상을 재현하기보다 자신을 둘러싼 일상의 풍경에 관심을 두었다.
 
동양화는 대상을 관찰한 후 생김새와 습성 등을 파악해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권세진은 현실의 대상들이 전통적인 필획의 방법으로는 쉽게 포착되지 않으며, 전통의 필법과 준법은 산수화를 그리기에는 적합하지만, 그러한 필법으로 현대의 이미지를 다루는 것은 어색하게 느껴졌다고 말한다.
 
이러한 이유로 작가는 순수한 이미지인 사진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사진의 사실성과 시간성, 그리고 동양화의 물성과 기법을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재현의 방식을 탐구해 나갔다.


권세진, 〈천장〉, 2014, 종이에 채색, 137.6x168.3cm ©권세진

초기의 작업에서 권세진은 흐릿한 유년기의 기억과 장소에 대한 상실감을 시각적으로 표현하였다. 가령, ‘흐려진 풍경’(2014) 연작에서 그는 이제는 사라진 작가의 유년시절의 장소를 ‘그리기’라는 행위로써 복원하며, 이에 대한 상실감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작가는 폐교가 된 자신이 다녔던 초등학교를 방문하여 그곳의 낡은 모습과 뒤바뀐 풍경들을 기록하고, 과거의 풍경과 대조하였다. 하나의 장소에 대한 과거와 현재의 풍경을 소재로 만들어진 작업은 각각의 시간을 마치 부유하는 잔상처럼 전달한다.


권세진, 〈깊은 밤〉, 2018, 캔버스, 종이에 먹, 130x193cm ©권세진

이처럼 권세진의 작업은 과거와 기억에 대한 주제를 다루던 초기의 작업에서 시작해, 2017년부터 현재와 일상의 풍경을 다루는 작업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대구에서 서울이라는 도시로 오게 되면서 겪은 심리적 변화와 이방인과 같은 감정을 받게 된 것을 계기로 시작된 ‘귀로’(2017-2018) 연작은, 이러한 감정을 바라보는 대상에 투사하는 시도를 담고 있다.
 
권세진은 매일 늦은 밤 작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주치는 장면들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그림으로 옮겼다. 작가에게 있어서 밤의 풍경은 낮이라는 시간대보다 더욱 예민하게 다가왔다. 일상의 감정들과 생각으로 가득 찬 밤 시간대는 그의 감정을 풍경에 투사하게 만들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그가 바라보고 사색하는 대상은 곧 자신이 되고, 그는 그 대상이 되어 비로소 대상은 단순한 형상을 넘어 어떤 의(意)를 품게 된다.


권세진, 〈밤의 온도〉, 2018, 캔버스, 종이에 먹, 181x223cm ©권세진

그리고 작업 과정에서 작가는 무한대로 확장되는 밤의 공간을 종이에 먹으로 채워 나가면서 먹을 하나의 색채로 인식하게 되었고, 이는 화면에서 추상적 공간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 결과, 〈밤의 온도〉(2018)에서부터 작품은 실재하는 장소적 성격보다는 구체적이지만 위치적으로는 추상적인 모호한 대상을 담기 시작했다. 특히, 권세진은 수면(水面)이라는 대상과 그 성격에 흥미를 갖게 되었는데, 바다와 같은 자연이 주는 모호한 장소성이 그림을 감상할 때 발생하는 선입견을 없애고 확장해서 생각할 수 있게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권세진, 〈물결〉, 2018, 캔버스, 종이에 먹, 100x80cm ©권세진

‘수면’ 작업을 이어 나가며 작가는 그가 사용하는 재료인 한지와 먹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을 하게 되었고, 무언가를 그린다기보다 먹을 칠하고 바르는 행위 자체에 집중하게 되면서 물성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이후 작가는 여러 종류의 먹을 모으게 되었고 하나씩 사용해 보면서 먹의 번짐이나 먹색과 빛에 반사되는 정도들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재료적 탐구를 통해 ‘수면’ 연작은 바다를 재현함과 동시에 먹을 실험하는 공간이 되었다.
 
더불어, 작가는 한지라는 특성을 반영하여 얇게 비치는 종이의 질감을 시각적으로 드러내고자 하였다. 이러한 방법으로 작업한 후, 별도로 배접을 하지 않고 전시공간의 벽에 설치함으로써 관람객이 그림 앞을 지나가면 움직임에 의해 종이들이 조금씩 반응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작가는 전통적인 방식 중 하나인 배채법을 응용하여 캔버스에 채색하고 배접을 하여 종이의 뒷면에서 색채가 은은하게 비치는 방식을 실험해 보기도 하였다.


권세진, 〈Yellow Line〉, 2021, 캔버스에 흑연, 아크릴, 180x290cm ©권세진

한편, 2021년부터 권세진은 동양문화의 탁본(拓本)이라는 방식을 차용하여 풍경 이미지를 제작하는 연작 ‘CMYK’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탁본의 경우, 비석이나 목판에 새겨진 서체를 보존하거나 기록하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졌지만, 그의 작업에서는 개인적이고 사소한 이유로 제작된다.
 
권세진은 일상 속에서 아름답다고 느껴진 순간이나 대상들을 사진으로 기록하듯이 종이에 새겼다. 먼저, 작가는 캔버스 위에 먹지를 대고 그 위에 종이로 인쇄한 풍경 사진을 올려놓은 뒤, 모나미 볼펜이나 BIG펜으로 이미지의 음영과 형태를 ‘마킹’했다.


권세진, 〈Window〉, 2021, 캔버스에 흑연, 아크릴, 80.3x65cm ©권세진

이 과정이 끝나면 채색 단계에 들어서는데, 이때 작가는 색을 섞지 않고 잉크젯 프린트의 인쇄 방식인 CMYK, 즉 청록색의 사이안(Cyan), 선홍색의 마젠타(Magenta), 노란색의 옐로우(Yellow), 검은색의 키 플레이트(Key Plate) 색상만을 이용해 채색했다. 여기서 ‘K’는 먹지에 해당하니 실제로는 CMY의 세 가지 색만 사용한 것이다. 처음에는 세밀한 부분을 먼저 채색하고 마지막에는 평붓으로 화면 전체를 쓸어주며 색을 입혔다.


《CMYK》 전시 전경(갤러리2, 2021) ©갤러리2

이 연작과 동명의 제목을 가진 개인전 《CMYK》(갤러리2, 2021)에서 선보인 작품들은 작가가 1, 2년 사이에 본인이 찍은 풍경 사진을 바탕으로 한다. 여기서 작가는 사진을 편집하거나 가공하지 않고, 사진 이미지 그대로 풍경화에 담았다.
 
하지만 이는 구체적인 공간적 특성을 드러내고자 하기보다는, 시간을 박제하는 사진 매체가 담은 이미지 자체를 재현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에서 출발한다.
 
전시 《CMYK》에서 그의 작품은 디지털 방식으로 찍은 사진 이미지에서 출발했지만, 대상을 옮기는 과정에서 톤과 색채가 미세하게 조정되며 마치 오래된 이미지에서 느껴지는 시간의 누적과 빛 바랜 낡음이 재현된다.


권세진, 〈Sunrise〉, 2021, 캔버스에 흑연, 아크릴, 53x45.5cm ©권세진

반복된 붓질과 번짐으로 인해 선명했던 이미지는 불분명해지고 흐려짐에 따라, 결과적으로 평범한 일상의 풍경은 향수가 느껴지는 ‘과거’의 이미지가 된다.
 
이렇듯 먹지를 이용해 풍경을 캔버스에 기록하는 그림은 선조들이 풍화작용으로 언젠가 사라질 석조문의 아름다운 글씨를 보존하려고 했던 탁본을 환기시킨다. 하지만 권세진은 오래된 과거의 유적 대신 현재의 삶을 조용히 관찰하고 기록한다.


《Perpetual》 전시 전경(갤러리2, 2023) ©갤러리2

한편, 2023년 갤러리2에서 열린 개인전 《Perpetual》에서 권세진은 그간 작업의 소재로 다루어 왔던 일상적 풍경 이미지를 최소화 혹은 중성화하면서 기억과 감정을 발화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고자 하였다.
 
전시의 제목은 작업의 소재인 ‘퍼페추얼 캘린더(perpetual calendar)’를 의미한다. 다이얼을 돌려 월과 요일을 설정하는 이 작은 탁상용 캘린더를 보고 작가는 시간을 조작할 수 있다는 점과 캘린더에 그려진 이국적인 풍경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권세진, 〈7월 2〉, 2023, 종이에 흑연, 아크릴, 풀, 210x150cm ©권세진

이후 작가는 오늘의 날짜를 표시하는 달력이면서 또한 과거의 시간을 회상하고 기억할 수 있는 기념물이기도 한 퍼페추얼 캘린더를 그려 나갔다. 그러나 이때 작가는 캘린더의 실물을 보고 그리는 대신, 해외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찾은 이미지를 보고 그리는 방식을 택했다. 그 이미지에는 흠집과 같은 사용감이나 표면의 색바램 등 시간이 축적된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오래전에 올린 게시물의 경우 사양이 낮은 핸드폰이나 카메라로 찍어서 사진의 화질이 낮기도 하고 촬영한 공간의 조명, 배경 공간, 사진의 색감 등 사진마다 특정한 시간과 공간이 함께 박제되어 있다. 여기에는 사물이 담고 있는 과거와 사진이 담고 있는 과거, 이 두 가지의 레이어가 덧씌워져 있다.
 
즉, ‘퍼페추얼 캘린더’ 연작은 작가의 개인적인 기억에서 벗어나 불특정 다수의 보편적인 과거를 소환하는 작업이었다. 이 사물을 맨 처음 발견하고 간직했던 타자의 오랜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권세진, 〈Today 31〉, 2023, 종이에 흑연, 아크릴, 풀, 150x210cm ©권세진

작업을 이어가던 권세진은 문득 캘린더 안의 숫자에 주목하게 된다. 퍼페추얼 캘린더의 형상을 빌리지 않더라도 숫자만으로 ‘기억과 감정의 발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Today’ 연작을 전개했다.
 
이 연작에서 작가는 퍼페추얼 캘린더의 형태를 모두 생략하고 숫자가 보이는 부분만을 확대하여 그렸다. 이때 그는 숫자뿐만이 아니라 칸 안의 그림자, 외부의 빛에 의한 색감의 변화, 중앙에서 약간씩 빗겨나간 숫자의 위치를 모두 반영하여 그렸다.


《Perpetual》 전시 전경(갤러리2, 2023) ©갤러리2

그는 네모난 공간 안에 숫자와 빛과 그림자가 있는 모습이 하나의 형식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이 간결한 기호와 섬세한 빛의 변화는 그동안 작가가 고민했던 질문, ‘구체적인 형상이 없이도 타인의 기억과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가. 과연 그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대답 혹은 어떤 실마리를 제공했다.
 
‘Today’ 연작을 그릴 때는 오로지 균일한 붓질과 색채만으로 그림이 완성된다. 대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할 때는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각 색채만의 뉘앙스와 묘사로부터 해방된 붓질은 그에게 어떤 자유로움을 느끼게 했다. ‘Today’ 연작 역시 실물을 재현하지만, 실제 대상의 평면성과 기호체계의 간결성으로 인해 그림은 구상적이지만 또한 추상적이다.


권세진, 〈Quite Time_Lily〉, 2026, 종이에 채색, 130x190cm ©권세진

이렇듯 권세진의 회화는 그가 바라보는 대상과 풍경으로부터 내면을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제작된다. 그렇기에 그가 담아내는 풍경은 눈에 보이는 장면을 넘어 포착되기 이전의 감각과 탈락된 정서, 선택되지 않은 시간의 층위를 드러내며, 보는 이로 하여금 각자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기억과 감정의 풍경으로 침잠하는 고요한 순간을 제시한다.

 "나는 그림을 매개로, 잊고 있던 기억을 끄집어내거나 과거의 시간으로 되돌아가는 회상의 경험을 하고자 한다. 우리가 어떤 한 장의 사진을 보고 그때의 시간과 기억을 회상해 내듯이 말이다. 그림의 대상이 되는 이미지들은 직접 사진을 찍기도 하고, 찍혀진 사진을 가지고 작업하기도 한다. 사진을 가지고 작업을 하는 이유는 사진은 양식화되지 않은 순수하게 대상을 기록하는 유일한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권세진, 작가 노트)


권세진 작가 ©인천아트플랫폼

권세진은 경북대학교에서 한국화를 전공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홍익대학교 대학원 동양화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개인전으로는 《고요한 풍경》(아트사이드 갤러리, 서울, 2026), 《Perpetual》(갤러리2, 서울, 2023), 《Distance》(갤러리2 중선농원, 제주, 2023), 《CMYK》(갤러리2, 서울, 2021)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21세기 정물화》(에스더쉬퍼 서울, 서울, 2026), 《2025 플랫폼 아티스트: 열하나의 말들》(인천아트플랫폼, 인천, 2025),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우란문화재단, 서울, 2024),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 《물 드는 산, 멈춰선 물》(목포문화예술회관, 목포, 2023), 《모뉴멘탈》(뮤지엄헤드, 서울, 2023), 《언박싱 프로젝트》(뉴스프링프로젝트, 서울, 2022), 《연속과 분절》(서울대학교미술관, 서울, 2022)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권세진은 2025년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 작가로 입주해 활동하였으며, 그의 작품은 우란문화재단, 포항시립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전남도립미술관 등 다수의 기관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