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연(b. 1988)은 밤의 사유들로부터 출발한 현실과 환상이 병존하는 풍경을 구축한다. 작가는 일상에서 겪게 되는 크고 작은 사건들, 그리고 그 사건들로부터 출발한 개인의 상상과 사유를 ‘밤’이라는시간과 장소에 집중하여 풀어나간다.


유재연, 〈Night Walker〉, 2016, 캔버스에 유채, 60.6x50cm ©유재연

유재연의 작업은 사적인 기억인 동시에 환상과 현실이 만나는 간극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들로 이루어진다. 작가는 유년시절의 경험과 기억을 애틋하게 시각화하고 한 켠에는 불안한 상황 혹은 불분명한 대상을 등장시킨다. 이는 사회와 개인, 과거와 현재, 내면과 외부, 존재와 인식 등과 같은 이중적인 세계 사이의 간극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유재연, 〈Night Skater〉, 2018, 캔버스에 유채, 122x91cm ©유재연

그의 작품 속에서 주된 배경이 되는 밤이라는 시간대의 공간들 또한 작가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런던에서 생활하던 작가는 어두운 밤이 되면 사람들로 가득 차 시끌벅적했던 공간이 조용히 가라앉아 언제 그랬냐는 듯 침묵으로 가득 찬 느낌이 강렬하게 다가왔다고 말한다.
 
특히, 고요한 밤 시간대의 공원을 가로지르는 경험은 기존에 알고 있던 도시의 느낌과는 전혀 다른 것들을 발견하고 느낄 수 있게 하였다. 풀벌레의 소리, 동물들의 작은 움직임 등이 평소보다 더 크게 다가오는 작은 경험들이 이어지면서, 작가로 하여금 마치 현세에서 잠시 벗어나 있는 듯한 도피의 감각을 느끼게 하였다.

유재연, 〈Moon Reader〉, 2019, 캔버스에 유채, 60.5x50cm ©유재연

이러한 생경한 감각을 바탕으로 2016년도부터 작가는 조용한 밤 시간대 홀로 산책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는 ‘나이트 워커’ 연작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 작업에서 유재연은 홀연히 나타났다 이내 사라지는 밤이라는 시공간을 통해 작가가 직접 경험한 고립과 자유라는 이중적인 상태를 표현하고,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뒤섞인 풍경을 담아낸다.

유재연, 〈Ice-cream Eater〉, 2019, 캔버스에 유채, 121.1x91cm ©유재연

전체적인 화면을 아우르고 있는 푸른색은 이러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은유하고 시각화한다. 유재연은 해가 넘어간 직후 온 도시에 어둠이 찾아오면서 모든 장면이 파랗게 물드는 순간을 ‘블루 타임(Blue Time)’이라 칭한다. 그러한 시간 속에서 명도가 분명한 낮의 햇살은 조용하게 어둠 안으로 숨고, 하늘과 강의 경계가 푸른 빛으로 연결된다.
 
작가는 안정감을 주는 찰나의 푸른빛을 맞이했던 감각을 간직한 채 캔버스 위에 얇고 투명한 레이어를 쌓아 올린다.


《The Night is Young》 전시 전경(갤러리룩스, 2019) ©유재연

2019년 갤러리룩스에서 열린 개인전 《The Night is Young》에서 유재연은 이러한 푸른 밤을 산책하는 사람들의 장면을 통해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지는 밤의 사유들을 담았다.
 
작가는 전시 《The Night is Young》에서 보여지는 작업들에 대해 “개인이 구축한 상징계와 현실사회의 실재계가 만나 생기는 부스러기들”이라고 말한다. 고요한 내면으로 침잠하는 밤의 세계에서의 환상적 경험과, 단절과 교류라는 양가적 특성을 가진 현실세계에 대한 간극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유재연, 〈Wetland Stroller〉, 2019, 캔버스에 유채, 121.9x91cm ©유재연

또한 현실과 환상이 공존하는 시공간의 감각을 풀어내는 그의 작업은 드로잉적인 요소들이 두드러진다. 애니메이션처럼 보이기도 하는 유재연의 화풍은 언뜻 밝고 귀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곧 그 안에 전복된 내용이 있음을 알아차리게 되는 순간 겉과 속의 간극이 드러나게 된다.


《Great to see you》 전시 전경(갤러리 룩스, 2021) ©유재연

한편, 2021년 개인전 《Great to see you》에서 유재연은 2020년 런던에서 거주하며 겪은 팬데믹과 락 다운으로 타인과의 교류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확장해 나간 밤의 공상들을 시각화하였다. 당시 창을 통해 바깥을 바라보며 간접적으로 감각한 소리와 풍경은 한없이 평평하게 가라앉았지만, 그럼에도 작가는 사람들의 흔적과 공상을 쫓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화면 속에는 초자연적인 풍경과 동화적인 만남의 장면들이 가득 차 있었다. 이러한 공상적인 요소들은 작가가 일상에서 꾸준히 생각하던 것들이 무의식으로 응축되어 어떠한 도상으로 등장한 것이기도 했다.


유재연, 〈On the blinking hill〉, 2021, 캔버스에 유채, 145.5x112.1cm ©유재연

가령, ‘소년’으로 일컬어지는 그림 속 인물은 작가 자신이기도 했다가 그가 생각하는 타인이 될 때도 있으며, 어떤 이야기의 이름 없는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또한 살아가면서 때때로 맞이하게 되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사유가 ‘무덤’을 닮은 형태로 등장하기도 하며, 그 모든 것들을 덮어주는 ‘유니콘’과도 같은 존재로서 하얗게 빛나는 덩치 큰 ‘새’가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는 이러한 요소들이 결코 어떤 각각의 의미를 분명하게 내포하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이는 그의 화면 속에서 그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보는 이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변형될 수 있는 유연한 존재들이다.


《Great to see you》 전시 전경(갤러리 룩스, 2021) ©유재연

아울러, 전시에서 유재연은 이전부터 전개해 왔던 ‘나이트 워커’ 연작과 함께 ‘조각회화(piece-painting)‘ 작업들을 소개하였다. ‘Home boat’, ‘Nightscape’ 연작 등으로 구성된 유재연의 조각회화 작업은 비정형의 캔버스에 채색된 작품들로, 조각과 회화 사이의 경계를 넘나든다.
 
그의 ‘조각회화(piece-painting)’는 조각품의 조각이 아닌 한 부분을 뜻하는 조각조각(piece by piece)으로 나뉘어 있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 일련의 작업은 작가의 드로잉 북에서 추출한 작은 사이즈의 마커 드로잉들이 두께감을 가지고 크기가 커진 채 실제 공간 안에서 납작한 조각들로 재탄생되는 과정을 거친다.
 
전시에서 선보인 조각회화들은 외출이 자유롭던 시절 바깥에 나가 추출해 오던 공원 풍경들과 봉쇄 기간 동안 창문을 통해 내다본 것들을 재조합한 결과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Run Hide Tell》 전시 전경(아트소향, 2023) ©아트소향

그리고 2023년 갤러리 아트소향에서 열린 개인전 《Run Hide Tell》에서 유재연은 ‘그리기’라는 행위를 현실로부터 피신하고(Run), 화면 안에 은신하며(Hide), 다시 세상으로 나와 이야기하는(Tell) 것으로 은유하고자 하였다.
 
전시를 이루고 있던 ‘나이트 워커’ 연작의 새로운 작업들은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는 숲의 초입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상상하며 그려졌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각각의 밤의 장소들 사이를 오가는 피사체들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무언가를 행하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인물들은 움푹 들어간 덤불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빛을 들여다보거나, 골똘히 생각에 잠겨 어딘가에 기대거나 앉은 채 일어나는 사건들을 응시한다. 이러한 장면들은 단지 고립의 상태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 언젠가 다시 바깥으로 나와 세상과 이야기할 가능성을 잠재하고 있다.


《Weeping Brushes》 전시 전경(도잉아트, 2025) ©유재연

나아가, 2025년 도잉아트에서 열린 개인전 《Weeping Brushes》는 기존의 ‘나이크 워커’ 연작의 연장선상에서 밤의 작업실을 탐구하는 작업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유재연은 화가, 조각가, 글 쓰는 작가, 시인처럼 창작을 업으로 삼는 이들뿐 아니라, 부엌 테이블이나 작은 책상에 앉아 아무도 보지 않을 글을 쓰고, 아무도 보지 않을 그림을 그리는 이들의 시간을 함께 떠올렸다.
 
무언가를 만들어내느라 밤을 꼬박 새우고, 생각을 토해내듯 노트에 무언가를 끄적이는 경험들에 대한 사유가 전시의 또 다른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작가는 또한 작업 과정 속 사소한 순간들에 주목하였다.


《Weeping Brushes》 전시 전경(도잉아트, 2025) ©유재연

팔레트 위 덩어리진 물감 속에서 불현듯 빛나는 색을 발견하거나, 겹겹이 겹쳐진 물감 사이로 드러나는 첫 선에서 느끼는 희열, 세척되는 붓의 물결과 거품 속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은 창작의 여정 속에서 작가로 하여금 숨은 기쁨이 된다. 심지어 젯소 위에 남겨진 날벌레의 흔적조차 우연한 기록으로 남아, 작업실은 사소하지만 의미 깊은 사건들이 쌓여가는 장소로 확장된다.
 
밤의 공원을 홀로 걷는 이들의 자유와 고독에서 출발한 작가는 좀 더 본연의 내면 풍경에 집중하고자 하였다. 불 꺼진 작업실, 붓과 연필, 널브러진 재료와 메모들, 벽에 기대어 있는 ‘과정 중의 그림들’까지 이 모든 사물과 장면은 실내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그림 속에서 서로 반응하며 교차한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실은 ‘안과 밖의 경계가 불확실한 풍경’으로 자리한다.


《Weeping Brushes》 전시 전경(도잉아트, 2025) ©유재연

전시 《Weeping Brushes》는 작가가 홀로 마주하는 고독과 몰입,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도구와 공간을 함께 사유하게 하였다. 늘어진 붓은 좌절이자 생명의 상징이며, 고요한 작업실은 외로움과 동시에 창작의 본질적 에너지를 품는다. 이렇게 유재연의 회화는 도구와 인간, 공간과 내면의 경계를 허물며 새로운 풍경을 제시한다.


유재연, 〈Slept, Awoke, Slept, Awoke〉, 2024, 캔버스에 유채, 152.5x121.8cm ©유재연

이렇듯 유재연은 감각하기 어려웠던 것들이 드러나고 내면에 고요히 침잠하는 시간대인 밤을 배경으로, 환상과 현실이 만나는 간극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들을 푸른 빛깔의 화면 속에 직조한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사회와 개인, 과거와 현재, 현실과 이상 등 서로 다른 것들이 만났을 때 오는 미묘한 감정들을 불러일으키며, 환상적인 화면 너머로 진지한 사색의 여지를 남긴다.

 "작가의 시각으로 그림을 그리게 되면서부터, 나는 내가 맞이하는 이 세계의 모든 간극에 주목하게 되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이 세계의 모든 간극이란 곧 어른과 아이의 괴리, 현상과 실재의 괴리, 일과 놀이, 사회와 환상, 공포와 꿈, 가정과 사회, 지식과 감정 등의 괴리이다.
 
내가 보는 것과 똑같이 펼쳐지는 것인 이 세상에 없다. 세상은 항상 조금씩 갈라져 있으며, 그 갈라진 틈 사이로 나는 표피 아래의 것들을 들여다본다." 
 
 
 
(유재연, 작가노트) 


유재연 작가 ©노블레스 컬렉션

유재연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영국왕립예술학교 회화과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개인전으로는 《Weeping Brushes》(도잉아트, 서울, 2025), 《밤에 그리러 나갔다가: Night Sketch》(도잉아트, 서울, 2024), 《Run Hide Tell》(갤러리 아트소향, 부산, 2023), 《Dream Weaving》(Union Gallery, 런던, 2023)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나의 진실된 환상》(아트센터자인, 서울, 2024), 《평면을 모양으로 스트레칭》(뉴스프링 프로젝트, 서울, 2023), 《STILL STANDING》(Union Gallery, 런던, 2022), 《No one is here》(도잉아트, 서울, 2021),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마오》(챕터투 & 챕터투야드, 서울, 2020), 《EMAP 2019 [BE COLORED]》(이화여자대학교, 서울, 2019)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유재연은 힉스 어워드 2016, 덴톤스 아트 프라이즈 2017 등을 수상하였으며,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정부미술은행,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헬로우뮤지움 등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