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우현(b. 1987)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일상적인 장소, 특히 우거진 숲 속에서 작업의 영감을 찾는다. 작가는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숲 속을 거닐며 느꼈던 시각, 청각, 촉각적 경험과 함께, 그 순간 자연 속에서 피어 올랐던 공상과 기억의 파편들을 캔버스 공간 안에 여과 없이 표현한다. 


심우현, 〈lava, ketchup〉, 2009, 캔버스에 유채, 122x152.5cm ©심우현

심우현의 그림은 익숙한 꽃과 잡초와 나무와 숲과 산등성이 미로처럼 얽혀있다. 몽환적 화면 안에서 이중삼중으로 겹쳐진 자연의 식물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주말마다 할아버지를 따라 파주에 있는 선산에 가던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출발한다. 당시 어린 심우현은 선산 뒤로 나있는 작은 오솔길, 우거진 숲 속으로 들어가 어른들이 찾을 때까지 그 속을 발길이 이끄는 대로 헤매는 것을 즐겼다.


심우현, 〈New Worship〉 (세부 이미지), 2010, 캔버스에 유채, 122x122cm ©심우현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숲을 거닐며 작가는 그 숲과 밀착된 것 같은 물아일체의 순간을 경험하였다. 그러한 순간에는 숲 속에서 시간을 잊어버리고, 자신을 가두고 있는 공간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참된 자유를 경험할 수 있었다.
 
심우현은 유년 시절 숲을 배경으로 시작된 매우 사적인 그 체험과 체득이 이후 자신의 인지체계에 주된 영향을 주었으며, 이는 곧 작가의 회화적 주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심우현, 〈Puff the Magic Bomb〉 (세부 이미지), 2014, 린넨에 유채, 190x260cm ©심우현

원색의 화려한 색채와 짧게 끊어지며 수없이 중첩되는 붓 터치는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숲이 가진 야생의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 한편, 강한 붓 터치와 대조되는 선으로 묘사된 인물은 흐릿하게 처리된 후경과 대조를 이루며 숲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자유로운 붓의 움직임과 흘러내리는 물감 자국은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한 이미지의 중첩과 함께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심우현, 〈Bubbles, Eggs, Lines〉, 2009, 캔버스에 유채, 76.2x101.6cm ©심우현

한편, 자연 속에서의 몰아적 경험은 심우현의 작업에서 탈-경계성, 탈-시공간성으로 전개되곤 한다. 그의 화면에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도래할 수많은 이름 모를 생명체들이 한곳에 뒤엉켜 나타난다.
 
그 안의 존재들은 종의 구분 없이 서로의 몸체가 뒤섞이고, 인간과 동물의 장기들이 하나가 되며, 수많은 양서류들의 알들과 동물들의 안구들이 화면을 뒤덮고 있다. 이러한 카오스적인 풍경은 다원적인 시점들에 위치하며, 그 안에서 각자만의 질서를 찾아간다.


심우현, 〈Flip〉 (세부 이미지), 2010, 캔버스에 유채, 122x122cm ©심우현

모호하면서도 규정할 수 없는 이미지들의 겹침과 혼선은 작가 내면의 운동을 반영한다. 숲이라는 자연 속에서 경험한 상황들은 작가의 심층부에 잠겨 있던 사건, 기억, 이미지, 상징들을 촉발시키고, 이는 곧 화면 속에서 얼룩, 연상, 살짝 드러내기로 표현되어 화면 전체의 동적인 흐름에 합류하게 된다.


《에로스 정경》 전시 전경(아트스페이스 휴, 2014) ©아트스페이스 휴

한편, 2014년 아트스페이스 휴에서 열린 개인전 《에로스 정경》에서 심우현은 ‘에로스(eros)’라는 신화적 관점을 가져오며, 이성의 체계에 억눌려 있던 본성(nature)을 몽환적이고 역동적인 풍경으로 풀어낸다.
 
심우현은 작업노트를 통하여 에로스와 로맨틱의 개념성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밝혔다.
 
“나의 작업은 만물의 탄생의 근원인 에로스(eros)를 중추로, 원시자연에서 날것의 에로스적 에너지가 잠재되어 있으며 이 유기적 에로스가 생물학적 충동에서 문화적인 충동으로, 또한 다른 국면으로 변증법적 사유로부터 시작한다.”


심우현, 〈Naughty Forest of Diana〉 (세부 이미지), 2014, 린넨에 유채, 205x320cm ©심우현

이러한 관점에서 작가는 생산과 창조로 나아가는 에로스의 변증법적인 기능에 주목했다. 그 결과, 화면에 배치된 각각의 이미지 요소들은 우연한 조우를 통해 충돌하고 파열하며 강력한 에로스의 힘을 발산한다.
 
화면 속에서 공상적인 요소와 뒤섞여 변형된 신화와 화산 폭발과 같은 기록적인 재난과 사건, 짐승, 이방의 주제에 대한 온갖 요소들, 그리고 그것들이 연결되는 기억에서 기인한 이국적인 성향의 상징물들의 위로 다른 색의 물감이 뒤덮여 지워지며, 에로스를 통한 ‘관계 맺음’이 반복적으로 파괴되고 있다.


심우현, 〈연꽃풍경1〉, 2013, 린넨에 유채, 140x165cm ©심우현

간혹 어떤 이미지의 부분은 소용돌이치는 표면을 다시 헤집고 불거져 나온다. 그리하여 이 화면에서 모든 위계 질서는 무너져 내린다.
 
화면 곳곳에서 모습을 일부분 드러내는 야생 짐승은 이성에 가려져 억눌린 성애와 같은 동물적 본능을 은유한다. 이는 화면에 긴장을 불러와 전체 요소들의 조화를 흐트러뜨리며 이성 본위의 합리성을 비판하고 전복시키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


심우현, 〈연꽃풍경2〉, 2013, 린넨에 유채, 150x190cm ©심우현

이렇듯 그의 화면 속 요소들이 관계 맺음의 생성과 파괴를 거듭하며 서로 간의 위계를 무너뜨리는 한편, 역동적인 붓질과 강렬한 원색의 향연은 화면 전체를 통일감 있는 유기적인 이미지의 추상적인 구성체로 보이게 한다.


심우현, 〈Succumbed to Reason〉, 2013, 린넨에 유채, 171x132cm ©심우현

한편, 심우현의 작품 속에서 나타나는 구도를 살펴보면 마치 조감도처럼 고각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거나 가까이 들여다 보는 등의 다양한 시점을 중첩시킨다. 또한 이미지 요소들이 한 장면으로 빠르게 압축됨으로써 선형적인 순서에 따른 내러티브가 축약되어 나타난다.
 
그렇게 압축된 자연과 현실은 그의 화면 속에서 정해진 상대적인 크기, 서로의 동떨어진 거리와 상관 없이 존재하거나 존재 했던 것들이 관계를 맺고, 또 거리를 두며 초현실적인 감각을 만들어 낸다.


《LAND.IN.SIGHT》 전시 전경(스페이스 K, 2016) ©스페이스 K

심우현은 숲 속에서의 경험과 상황들이 자신의 ‘안’으로 들어가면서 일으키는 일련의 과정과 작용을 캔버스에 나타내는 작업을 거쳐, 점차 자신의 내면이 작업의 시발점으로 옮겨지게 된다. 즉, 작업의 출발점이 되는 장소가 그가 바라보는 시지각에 의한 풍경을 받아들이는 통로로부터 자신의 깊숙한 곳으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순수한 ‘바깥(le dehors)’의 영역이 되며, 그 상(像)은 내면의 풍경”으로 비춰진다. 다시 말해, 그의 내면이 역으로 표출되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의 이미지들이라 할 수 있다.


심우현, 〈Blind Love〉, 2018, 린넨에 유채, 153x190cm ©리안갤러리

언뜻 숲 속에서 볼 수 있는 갖가지 이름 모를 종류의 수풀과 만개한 꽃 무더기, 나뭇가지, 부드러운 토양, 거친 돌의 표면 또는 곤충과 양서류의 모습을 실제적으로 묘사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자신이 체험한 숲 속 이미지를 환영적 추상성으로 구현한 것과 같은 모호함을 드러내는 심우현의 회화 공간은 그 스스로 규정하는 바와 같이 ‘바깥(le dehors)’ 영역의 표상이다.
 
이 바깥은 생과 사, 우연, 혼돈 등 우리 의식 그 밖의 무의식과 잠재의식, 직관의 영역에서 분출되는 심층적 정신성의 시각화를 의미한다.


심우현, 〈Fiction #5〉, 2018, 린넨에 유채, 98x105cm ©리안갤러리

그런 점에서 작가가 창조한 회화 공간은 어느 한 특정 숲의 공간이 아닌 중립적, 잠재적 공간으로서의 비장소(non-lieu)성을 띤다. 마르크 오제(Marc Augé)에 따르면, 비장소는 장소에 대한 부정의 의미가 아닌 여러 공간의 중첩된 가로지르기, 즉 상호 대체와 호환이 가능한 공간을 말한다.
 
이러한 비장소성은 초시간성(atemporality)을 동반한다. 작가의 감성과 사변적 흐름 안에서 무의식적으로 중첩되는 여러 숲에서 보낸 서로 다른 시간적 기억의 조각들은 비선형적 시간성의 표출이다.
 
과거 그리고 근시에 작가가 경험한 실제 숲에서의 시간의 유동은 그의 회화 공간에서 동시적으로 뒤섞인다. 과거도 현재도 아니고 반대로 과거도 현재도 될 수 있는, 현실적 시간의 잣대로 잴 수 없는 공의 상태이자 무한정성을 드러낸다. 또한 우리가 이러한 작품 공간 속으로 몰입하는 순간, 현실 세계의 시간성 또한 사라지거나 유보된다.


《매혹의 숲》 전시 전경(리안갤러리, 2018) ©리안갤러리

2018년 리안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매혹의 숲》에서 심우현은 자신의 유쾌하고 쾌활한 사적 감정을 더욱 강조하고자 했다. 전작들이 두터운 물감과 진한 색조로 빼곡히 채워진 반면, 이 전시에서 선보인 작업들은 마치 수채화를 연상시키듯 훨씬 더 가볍고 경쾌한 색감으로 공간적 휴지기와 투명도를 살렸다.
 
전시 서문에 따르면, 작가가 창조한 비장소의 초시간적 회화 공간은 어떤 면에서는 일종의 “반사성을 가진 투명한 장막”이라고 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숲에 매혹된 작가의 감각적, 심리적 경험이 회화 공간으로 투사되고, 이는 곧 반사되어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주술적 영매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심우현, 〈음악을 멈출 수 없어〉, 2021, 린넨에 유채, 132x162cm ©심우현

이렇듯 심우현의 캔버스는 수많은 붓질과 물감의 흔적이 기록되는 물리적 장소이자, 작가의 의식 ‘바깥’에 위치한 이미지들이 무의식적으로 투사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숲 속에서 발견한 다양한 요소들의 생명성이 작가의 심리적, 정서적 필터를 거치며 그의 화면 속에서 또 다른 생명으로 육화되고, 캔버스의 흰 공간은 내면의 운동이 요동치는 하나의 숲이 된다.
 
안과 밖, 자연과 인간 등 상반되어 보이는 요소들이 모두 뒤엉키며 리듬을 이루는 그의 그림은, 그 자체로써 생동하는 생명력을 발산하며 현실 세계의 시공간에서 벗어난 더 깊은 심연의 세계로 이끈다.

 "나는 회화적 공간을 숲을 거닐 듯이 가로지른다."  (심우현, 작가 노트) 


심우현 작가 ©종근당예술지상

심우현은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페인팅과 드로잉을 전공하고, 펜실베니아 대학원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한 후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과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개인전으로는 《심장이 만들어지는 과정》(Humor Garm Got, 서울, 2023), 《심연의 리듬》(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파주, 2022), 《매혹의 숲》(리안갤러리, 서울, 2018)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당신의 경이로운 세계, 그리고 예술》(SH Gallery, 서울, 2024-2025), 《스코프 앤 스케이프》(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파주, 2023), 《나의 잠》(문화역서울284, 서울, 2022), 《회화의 시간》(세종미술관, 서울, 2019), 《LAND.IN.SIGHT》(스페이스 K, 과천, 2016), 《회화, 현실과 초현실의 사이》(인사아트센터, 서울, 2015)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심우현은 2013년 종근당예술지상 신진작가 3인에 선정된 바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