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agenexx》 전시 전경(온그라운드2, 2017) ©박정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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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제목 ‘Xagenexx’는 언어화를 거부하는 무의미의 기호다. 특정 언어로 독해되지 않으려는 이러한 선언적 태도는, 그러나, 여기에 주의깊게 읽혀야 할 것들이 있음을 반증한다. 읽히지 않겠다는 저항의 의도를 충족시키는 것은 오류를 각오한 채 읽고 또 읽어보는 행위가 아니겠는가. 사실, 이 ‘무의미한’ 단어 ‘Xagenexx’가 본래 어떠한 ‘유의미한’ 단어로부터 비롯되었을지를 간파하기란 불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단순히 x의 자리에 원래 있던 알파벳의 정체가 아닐 것이다.

박정혜 작가 스스로 이 출발점이 밝혀지는 걸 꺼려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보다 주목해야 할 차원은, 본래의 알파벳을 능청스럽게 대체하고 있는 ‘x’의 다층적 지위이다. 그것은 ‘agene’ 양쪽으로 포진 해있음으로써 알파벳 x를 가장하나, 또한 그 자리에 다른 알파벳이 있었어야 함을 지시하는 미지의 값 x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알파벳을 지우는 행위로서의 수행적 x이어야 하고, 덧붙이자면, ‘a gene’, 곧 어떤 유전자의 양편으로 확산되고 있는 생명의 움직임이기까지 하다. 따라서 이 글은 제목 ‘Xagenexx’를 탈언어화 시키는 결정적 요인 ‘x’를 일종의 변수로 설정, 이에 대입 가능한 (거짓) 값들을 추정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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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 들어서면, 관객은 수많은 x의 출현과 마주하게 된다. x의 형상이 회화들의 표면에, 또한 전시장 두 곳에 분포된 유리창 표면에, 촘촘하고 가득 하다. 제목을 비의미화시키고자 획책하는 x의 존재가 사실상 전시를 핵심적으로 구축하는 시각적 구조물이 라는 사실은, 이를테면 회화 이미지와 언어 텍스트 간의 상호 심문을 불러일으킨다. 제목에서 누락된 언어의 기능은 회화 이미지로 돌아와, 그것을 서사적으로 읽으려는 행위를 충동하고 연이어 차단한 다. (그러므로 제목에서 본래의 알파벳이 x로 대체되면 서 발생되는 것은 의미의 실종이 아니라 질문의 증폭이다.)

한편, 공간의 차원에서, 회화에 서로 다른 색과 선으로 구현된 일련의 x들이 캔버스를 뚫고 나와 유리창과 벽으로 이어지는 풍경은 꽤나 흥미롭다. 회화의 단위는 어떻게 구획지워지는가. 감상 대상으로서 전시라는 모듈은 각 회화들의 물리적 총합과 어떤 산술관계를 갖는가. 세계 일반과 특정 회화는 어떻게 서로를 내포하거나 암시할 수 있는가. 얄궂게도, 마침 전시 기간 중 한쪽 창문 너머로 시공 단계의 건물이 보이는데, 그 미완성 건물에 설치된 유리창에는, 흔히 그렇듯, 유리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대각선 x자의 테이핑이 부착되어 있다. x는 회화 프레임 내부가 세계로 관통되지 않는 막힌 표면임을 알리며, 동시에 그럼에도 늘 그 너머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음을 고하는 지표다.


《Xagenexx》 전시 전경(온그라운드2, 2017) ©박정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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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x는 3차원 세계에 대한 2차원 회화의 함수이며, 그렇게 세계가 하나의 표면으로 수렴되는 과정이다. 단일한 점을 향해 응축시키는 x는 빛을 삼키고 세계를 흡수한다. 점으로서의 x에 대한 가장 유명한 가설은 선 원근법일 것이다. 회화가 점차 이 장치를 포기하기로 한 이래, 원근법이 곧이곧대로 호명되어선 안 될 이름이 된 시점에서, 박정혜가 《Xagenexx》 전시에 뿌려놓은 x들은 마치 원근법의 뼈대를 노출시키는 듯하다. ‘투과하여 본다’는 원래의 의미(ars perspectiva/perspicere)처럼, 원근법은 중층의 공간들을 상정하고 이를 꿰뚫는 행위를 요청한다. 공간을 관철시킴으로써 깊이의 인상을 탄생시켰던 원근법이, 회화 제작 단계에서의 원리가 아닌, 회화 표면에 납작 달라붙은 도상으로 구현될 때, 이제 원근 법을 둘러싼 질문은 각도를 비튼다. 회화가 담을 수 없는 시간의 흐름과 시시각각 변해가는 복수의 시점들을 어떻게 회화에 관통시킬 것인가. 《Xagenexx》에서 이러한 질문은 또한 빛의 문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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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혜 본인은 가령 전시작 〈Twins chord〉의 마름모꼴 형상으로부터 특정한 대상을 연상하려는 시도를 완고히 거부하겠으나, 일단 나처럼 이 x의 흐름을 원근법과 연결시켜 상상하기 시작한 관객이라면 아마도 카메라의 조리개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렌즈를 관통하는 빛의 양을 조절하는 이 장치는 열림과 닫힘의 운동 속에서 x의 형상을 쉴 새 없이 새겼다 지운다. 조리개가 허용하는 빛의 양은 이미지가 구현하는 깊이의 문제와 직결되며, 말하자면, 원근법의 이데올로기를 사진이 회화로부터 쟁취하게 되는 결정적 역할을 맡아왔다. 일련의 순간들의 흐름으로부터 특정한 순간을 분리해내는 조리개가 작동될 때마다, 세계는 일순 응결된다.

흐름으로부터 하나의 단면을 도려내는 것은 늘 진실 이상의 은폐를 함축할 터인데, 그렇다면 《Xagenexx》는 회화의 표면이 담을 수 없는 것들에 선언적으로 x를 그으며 기만의 시도를 지워낸다. 그것은 사진을 모방하는 대신, 모방할 수 없음을 표방하며, 여러 가능성들의 기호인 채로 물러난다. 이 기호들은 빛에 둘러싸여 있는데, 이때 빛은 회화에 담겨 있거나 회화로부터 발산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이를테면 전시장으로선 이례적인 유리창 너머로부터 벽면을 훑고 공기를 가로질러 캔버스 위에 머문다. 그렇다. 《Xagenexx》는 빛의 전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차올랐다 스러지는 빛. (농담을 더하자면, 심층을 표면에 머물게 만드는 x-ray 라 부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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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겐 다 끝난 문제다. 빛과 시간이라니. 오랜 시간 회화가 논해왔던 빛과 세계 재현의 문제는 사진 및 영화의 등장과 함께 영상에 위탁되었으며, 그마저도 빠르게 소진되어 가는 중이다. 회화가, 회화로, 시간의 흐름을 담으려는 시도 역시 충분하다면 충분한 변형들을 통해 나름의 성과에 대한 인정과 나름의 패배에 대한 수긍을 일으켜왔다. 사실, 회화가 가시적 세계의 재현에 대한 의무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킨 이래로 회화가 오로지 자신만을 염두에 둔 채 재귀적 질문을 반복했을 때, 빛과 시간, 두 개의 항은 영영 회화로부터 추방당할 듯 보였다.

박정혜의 《Xagenexx》는 빛의 경로를 쫓되 그것을 담을 수 있다고 함부로 주장하지 않는데, 이는 역설적이게도 영화에 대한 어떤 주장을 떠올리게 만든다. 마노엘 데 올리베이라에 따르면, 영화란 “설명이 부재한 채로 빛 안에 잠겨 있는 탁월한 기호들의 넘침”이다. 《Xagenexx》는 설명할 수 없는 상태에 압도당하기보다는, 잠정적으로 설명에의 의지를 정지시킨 채, 기호들의 넘침을 응시하게 한다. 올리베이라의 문구 와 다른 것은 다만 빛의 장소와 방향이다. 이미지 내부로부터 발산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 표면을 핥는, 머무르다 퇴락하는 빛. 그리고 빛의 흔적으로서의 x들. 시간의 경과에 따른 빛의 연속을 탐미하는 박정혜의 회화는, 영상을 차용하거나 그것과 유사하고자 노력하지 않은 채, 어쩌면 영화가 이루고자 했던 바로 그것에 기이한 방식으로 맞닿는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