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호, 〈둥〉, 2014 © 유승호

유승호의 글씨 그림: 반복을 품은 변주
 
유승호는 글자를 반복해서 쓰거나 점을 찍으면서 형상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한다. 특히 산수화 시리즈는 작가를 대표하는 ‘글씨 그림’이다. 무심히 보면 여느 수묵 산수화와 다르게 보이지 않지만, 작품에 가까이 다가가서 들여다보면 깨알같이 작은 글자들이 화면 속을 부유하며 빼곡히 집적되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면서 만들어낸 형상임을 알게 된다. 이렇게 작가는 문자와 그림, 언어와 이미지 사이를 넘나들며 그 둘의 경계를 조율하는 그만의 지난한 놀이를 천착해 왔다.
 
처음 글자 쓰기로 형상을 만들어간 것은 〈으이구 무서워라〉(1997)라는 작품부터였는데 이것은 1993년에 같은 제목으로 그렸던 얼굴 드로잉을 모티브로 작업한 것이었다. ‘으이구 무서워라’는 반복되는 문장의 글쓰기로 가득 찬 화면은 흑백의 모호한 뭉텅이들이 대기 중에 떠 있는 듯 뿌옇고 유동적인 이미지가 되었다. 기존 드로잉에서의 얼굴 형체는 한참을 들여다봐야 어렴풋이 알아볼 정도로만 흔적이 남고 사라져버렸다.

문자와 이미지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는 데 있어 구체적인 형상 자체는 시작점부터 큰 의미가 없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신에 이 새로운 작업 스타일은 어딘가 수묵으로 그린 전통 동양화처럼 보이고 느껴지는 특징들을 발현하였고 이를 포착한 작가는 그러한 효과들을 더 극대화하기 위해 산수화 이미지를 활용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야~호〉(1999)에서 무수한 손글씨 ‘야~호’들이 모여 산수화 형상이 처음 만들어졌고, 그 이후 이어진 〈슈-〉(1999-2000)부터는 송대의 산수화 등 명화를 원전으로 삼아 모방 및 변형을 가미한 글씨 그림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유승호, 〈슈〉, 2014 © 유승호

특별히 전통 산수화에서의 스미고 번지는 농담 표현에 의한 자연스러운 선의 표현은 학부 때부터 명확하게 떨어지는 선묘를 좋아하지 않고 그리는 대상들을 일부러 겹쳐지게 하거나 형태감을 조금씩 해체시키면서 그려온 작가의 기질과도 잘 부합했을 것이다. 이렇게 불분명하고 정형화되지 않은 형태 감각에 대한 선호는 작가의 작품 전반에 내재되어 있다.

재료에 있어서는 종이와 로트링 펜을 지속적으로 사용해 왔는데, 주로 사용하는 장지(壯紙)는 동양화에서 쓰는 종이인데 반해 붓은 펜으로 대체되었다. 윤곽선을 긋는데 쓰이는 로트링 펜 자체는 서양에서 들어온 제도용구이기는 하지만 펜에 담긴 잉크의 주성분이 ‘먹’이라는 점은 다시 수묵화와 연결되어 흥미롭다. 이러한 재료는 손글씨라는 작가만의 특색을 구현하는 데 있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그렇기에 재료의 선택에 있어서도 앞서 언급한 작가의 기질과 심미적 취향이 반영되어 있다고 하겠다.
 
작가가 활용한 역대 명화로는 북송대의 궁정화원이었던 범관과 곽희의 산수화 작품인 〈계산행려도(溪山行旅圖)〉와 〈조춘도(早春圖)〉, 조선 초기의 화원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등이 대표적이다. 모두 공통적으로 험준한 산세를 강약이 뚜렷한 농담으로 화폭에 담아내고 있어 한눈에 느껴지는 그림의 인상이 매우 강렬하다. 작가는 바로 이 시각적인 강렬함과 거기에서 뿜어 나오는 강한 에너지에 이끌려 이 작품들을 택했다고 한다.

그림의 역사적인 배경이나 맥락, 의미를 파악하고 선택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시각적인 매력을 느끼는 본인의 직관과 감성에 의한 선택인 것이다. 때문에 〈슈-〉에서 범관의 〈계산행려도〉 전경의 낮은 구릉과 관목들을 생략하고 화면 중앙에 마치 거대한 비석처럼 서 있는 산 부분만을 취한다거나, 〈힘줘, 여기는 힘 빼고〉(2003)처럼 더 과감하게 곽희의 〈조춘도〉에서 산의 특정 부문만을 가져와 확대시켜 작업해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이렇게 작가의 직관에 의한 소재 선택과 자유로운 변형에 의해 탄생된 작품들은 유승호의 글자 산수화가 된다.


유승호, 〈야~호〉, 2014 © 유승호

이러한 글자 산수는 다양한 양상으로 진행되어 왔다. 〈슈-〉, 〈주루루룩〉(2000)과 같이 의성어가 내포하고 있는 청각적, 시각적 이미지가 작품의 형상과 직접적으로 맞물려 작품이 구현되는 효과가 극대화되기도 하고, 반복해서 써넣은 숫자들과 계산 부호들이 산의 형태를 이룬 〈암산〉(1999)에서처럼 속셈 혹은 돌산이라는 ‘암산’의 이중적 의미를 형상화함으로써 언어유희를 즐기기도 한다. 또 〈힘줘, 여기는 힘 빼고〉나 대중가요 가사를 화폭에 빼곡하게 적은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2014), 〈낭만에 대하여〉(2014) 등과 같이 쓰여진 문장과 그 문장들이 표현한 풍경 사이에 특별한 연관이 없는 경우도 있다.


유승호, 〈yodeleheeyoo~〉, 2014 © 유승호

이 일련의 글씨 그림에서 다루어 온 주제 혹은 그 표현 방식에 대해 유승호는 ‘흉내 내는 말’이란 뜻의 ‘Echowords’, 한글로는 ‘시늉말’이라는 단어로 규정하였다. 우리는 한 음절이나 단어, 문장이 계속해서 소리를 내고, 또 그에 대한 메아리가 돌아오기를 반복해서 이어지는 소리의 울림이 화면을 채워나가는 것을 본다. 그러나 돌아오는 메아리가 처음 낸 소리와 완전히 똑같지 않듯이 그의 글씨 그림에서 반복된 모든 글씨는 같으면서 또 같지 않다.

쓰여진 글씨의 의미와 그것들로 이루어진 형상 사이에 필연적인 연결고리 없이 자유롭게 문자와 그림의 경계를 오가는 작업. 그리고 결국에는 그 경계를 해체해 가는 작업이 앞으로도 여러 변주를 통해 나타날 것이다. 작가는 경계에서 가장 앞선 곳에 머물며 사람들이 보지 못했던, 놓치고 지나간 것들을 끄집어내야 한다. 지금까지처럼 섬세하고 예민한 직관, 유머와 재치가 넘치는 발상으로 우리가 보지 못한 것들을 끄집어내 주기를 기대한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