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히 알려진 유승호 코드를 짧게 해설하면 이렇다.
 
활자의 총합으로 형상을 완결, 점 단위로 헤쳐모인 화면을 통해 회화 존재론의 재구성, 준(準)동양회화의 고풍 취향, 이 모두를 가능하게 하는 노동집약적 점묘 과정을 (관객이) 추측할 때 얻는 감동. 유승호 작업 연보를 고유하게 해설하려면 이처럼 압축될 수 있을 것 같다. 화폭 위로 우수수 쏟아지는 음절의 비(雨). 급기야 떨어지는 비를 묘사하는 '우수수'라는 의태어마저 작업의 모티브로 더러 등장하곤 했다.
 
결국 음절과 점의 총합으로 완성된 종래의 대표작들의 연장에 가깝지만, 2010년 전후의 일부 변화와, 유승호를 기술하는 주제어를 다시 정리해 보기로 한다.
 
기본적으로 공간예술 전통이 강한 미술에 시간예술의 스토리텔링이 개입된 건, 동시대 화단의 거스를 수 없는 양상이 되었다. 때로 성공을 거둔 스토리텔링 작업도 보이지만 과분한 주제 선정 때문에 관람의 피로를 유발시키거나, 자족적인 결과로 그치는 예도 무척 많다. 일부 창작가와 비평가가 가담하는 과분한 주제의 관행과 스토리텔링의 열망은 이론 과잉으로 연결되기 쉽고 현재가 그러하다.

이 같은 항간의 (과분한 주제와 이론 과잉)유행에 비추어서, 점, 음절, 단어, 문장으로 이어지는 유승호 회화의 '텍스트주의'는 의미의 지연, 불필요한 이론 따돌리기, 급기야 텍스트가 맺은 고유한 의미의 부인으로까지 진행된다. 의미의 산물인 텍스트를 사용하되, 시각 유희의 매개로만 한정해서 쓴다.


〈우리 그냥 빤짝 만나요〉 콘셉트 시트 © 유승호

보잘 것 없는 기호가 빌미를 던져 그것이 말꼬리를 계속 잡혀, 끝없는 말장난의 유희로 전개되고 결국 거대한 엉터리 이야기로 귀결되는 유승호 작업의 연쇄는, 도미노 효과의 재미를 텍스트와 이미지의 '무의미한 공조'로 이룬 것이다. 사진가 제프 월의 이름을 영어로 쓴 Jeff Wall이 변형을 거듭해 '남성기 → 화(火) → ♨ → 원자폭탄 버섯구름 → 발기한 남성기 → 전통 가옥 → 고인돌 → 싹 → 꽃잎을 거쳐 한국의 국기로 변형되는 〈Jeff Wall(concept sheet)〉은 악의 없는 뒷말 잇기 유희를 차용해서 유사 형상 연쇄로 손 본 것이다. 상호 무관한 용어나 형상들이 연쇄적 변형을 거듭하는 이런 방법은 우수수 쏟아지는 활자의 비로 영문 모를 형상이 완성된, 유승호 작업의 기본 골격이기도 하다. 그것은 원시적 유희와 직감에 호소한 유모의 공감대여서, 엉터리 의미 생산에서 기만을 느끼기는 고사하고 공감을 맛본다.
 
형상의 변이 과정은 전 대상과 유사한 무엇을 뒤에 연달아 내놓는 것인데, 이런 방법 말고도 동음이의어를 개입시키거나, 성격이 공유되는 형상이나 기호를 앞뒤에 배치하기도 한다. 〈우리 그냥 반짝 만나요(concept sheet)〉(2010)는 작은 점으로 출발해서 독일 국기가 되기까지의 연쇄를 보여주는데, 아픈 개의 모습을 dog ill 이라는 문법적으로 부정확한 영어가 계승한 후, 유럽의 국가 깃발로 연결시키는 재치에서 동음이가 개입한다. 또 한 묶음으로 제시된 '♡와 남성기와 女'의 연계는 형상이 연거푸 변해서 이뤄진 거지만, 실상 세 기호 사이의 연관성이 높다는 걸 보는 이도 금세 알 수 있다. 이처럼 유승호가 단어나 형상을 변형시켜 다른 무엇으로 바꿔 내놓을 때는, 작품에 따라서 개연성을 갖추기도 하고 실은 전혀 없기도 하다. 이것은 작가의 본의야 뭐건, 의미/이론의 과잉으로 치닫는 시각예술의 관행에 환멸처럼 읽히기도 한다.
 
작가가 그런 의도가 없다면(나는 없을 거라고 추정함), 회화 구성의 가능성을 점묘로 타진한 유승호가 '주제가 전제되지 않은 회화-때론 게임으로서의 회화'에 미학적 비중을 둔다고 볼 수 있다. 단어나 문장이 지정된 의미에 사로잡히지 않고 해체되는 건, 유승호의 특정 작품에 한정되지 않고 두루 나타나는 것 같다. 화폭 위에서 음절의 총합으로 분산된 문장들을 보자. 가까이 다가가 음절들을 연결시켜서 하나의 완성된 문장을 '발견'할 순 있다. 하지만 모든 산개된 문장을 그렇게 발견할 필요는 없다. 유승호의 화면에서 단어들은 의미를 시사하는 매개이지만, 기본적으로는 그 의미를 강변하지 않는 기호의 나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유승호, 〈이창〉, 2009, 쌍안경, 삼각대, 낚싯줄, 플라스틱, 아크릴, 가변크기 © 유승호

고정된 의미를 지연하는 미학적 기질은 2010년 전후 제작된 설치물에서도 관찰되는 것 같다. 〈이창〉(2009)은 한눈에 전 문장을 볼 수 없도록 설계 되었다. 쌍안경의 초점을 맞추는 과정에서 원거리에 걸린 문장이 부분 부분을 '확인'될 따름이다.
 
확정된 의미의 지연과 중의법을 차용된 작업으로 〈뇌출혈 natural〉(2007-2009)이 괜찮은 예 같다. 뇌출혈과 형용사 '자연스러운'의 영어표기 natural 사이에는 유사한 발음 외에는 '의미 공유'가 전무하다. 유사한 발음이라는 가느다란 끈에 의지해서 뇌출혈과 natural은 관념 산수풍으로 묘사된 풍경화에 스스로를 무리 없이 기입시킨다. 자연 산수는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장면'이니 natural과 통할 테고, 있는 듯 없는 듯 화면에 스며든 뇌의 단면 이미지들은 뇌출혈이 생긴 뇌의 단면을 fMRI로 담은 영상과 연결되니 뇌출혈과 무리없이 통한다.
 
화폭이 과중한 주제에 발목이 잡혀있지 않은 까닭에, 텍스트를 무의미한 기호로 갖다 쓰는 유승호의 작업은 화폭 너머로도 손쉽게 연장되는 것 같다. 광주시립미술관 기획전 《진.통. 1990년대 이후의 한국현대미술》(2012)의 설치 장면은 상호 연계성을 갖지 않는 개별 그림들이 기다란 벽 여기저기에 걸려있다. 각 그림마다의 타이틀은 그림들 주변에 작가의 육필로 적혀있는데 그려졌다. 의미에 천착하지 않는 그림을 닮아서 육필로 쓰거나 그린 제목들도 독립된 기호처럼 서로 연결되어 전체 벽을 장악하는 데 기여한다.


유승호, 〈뇌출혈 natural〉, 2007-2009, 종이에 먹, 200 x 182.5 cm © 유승호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