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연화(b. 1988)는 일상에서 마주하는 풍경들을 다양한 매체로 풀어나가며, 한정된 물리적 공간의 크기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그는 물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가져오며, 빗물, 바다와 강 등 물과 관련된 작업을 펼쳐왔다.
 
이러한 유동적이고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요소들을 다뤄 온 그의 표현방식은 각기 다른 성질의 매체들을 하나의 서사로 연결하며,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 오고 있다.


허연화, 〈달천천〉, 2017, 레진, 철 외 혼합재료, 65x42x63cm ©허연화

허연화의 물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예술적 실험은 수영, 비, 강, 바다 산호 등 물을 통해 몸으로 느꼈던 촉각, 시각, 청각 등의 감각적 경험을 확대하여 평면에서부터 입체까지 다양한 형태로 담아낸다.
 
예를 들어, 2017년도 작업 ‘달천천’ 시리즈는 물에 대한 작가의 자전적인 경험에서 출발한다. 제목인 ‘달천천’은 충청북도 보은군 봉황리를 지나는 하천의 이름으로, 이곳은 매년 여름 작가가 할머니 집에 방문할 때마다 수영을 하던 곳이다.
 
허연화는 계속해서 흐르는 물과 달리 늘 변함없어 보이는 달천천의 풍경과 감각을 작업으로 기록하고자 했다. 어느 여름날 수영을 하던 중 물 밑 수풀이 다리와 허리를 감쌌던 감각 등을 바탕으로 작가는 머릿속에 축적된 달천천의 타임라인을 만들어 나갔다.


《달천천》 전시 전경(아트스페이스 오, 2017) ©허연화

이때 그는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대로 타임라인을 만들기보다는 특정-시간대의 특정-다면체로 공간을 제작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 결과물로서 선보인 개인전 《달천천》(아트스페이스 오, 2017)는 서로 간섭하는 공간들의 전개도로 구성되었다. 작업은 접혀진 것과 펼쳐진 것, 그리고 평평함과 요철들의 레이어로 이루어졌다.

허연화, 〈Let your body relax〉, 2020, 혼합재료, 가변크기, 《Floating people》 전시 전경(탈영역우정국, 2021) ©허연화

허연화는 이러한 ‘접힘’과 ‘펼침’이라는 전략을 통해 현재의 감각들을 변주하는 표현방법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그는 이와 같은 전략을 한정된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확장시키며, 이미지 맵핑을 통해서 현재라는 타임라인 내에서 재사용되는 이미지의 소비 방식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2021년 탈영역우정국에서 열린 개인전 《Floating people》에서 허연화는 다양한 관심사와 연대를 바탕으로 하는 구성원들이 분산형 데이터 저장 기술을 암시하는 연결 고리들 안에 놓인 상황을 펼쳐 놓았다.


《Floating people》 전시 전경(탈영역우정국, 2021) ©허연화

2021년 코로나19로 인해 물리적 공간이 작동하지 않았던 당시, 사람들에게 지속 가능한 장소는 온라인 공간이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상황 속에서 당시의 인류는 온라인에 접속하여 공동체로서 네트워크를 지속해 나갔다.
 
허연화는 이러한 물리적 세계와 비물리적 세계,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관계로부터 재조직된 사회 시스템과 이로부터 재편된 신체성의 존재 방식을 탐구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때 그는 온라인 네트워크 속 공동체, 특히 취향과 목적을 함께 하는 사람들과의 공동구매나 화폐거래 구조에 관심을 두었다.


허연화, 〈Let your body relax〉, 2020, 혼합재료, 가변크기, 《Floating people》 전시 전경(탈영역우정국, 2021) ©허연화

작가는 그러한 시스템이 사회, 경제적으로 광범위하게 유통되고 있는 세계에서, 자신이 속한 구조적 모순을 자각하고 이를 시각적 감각과 배치로서 다뤄보고자 했다. 가령, 사이버 범죄에 사용되는 블록체인 시스템과 파일 공유에 쓰는 P2P 시스템이 서로 동일하다는 데서 오는 혼란과 갈등에 주목하며, 작가는 “그 안에서 서로 간의 가치가 충돌할 수밖에 없는 모순된 상태로부터 이전보다도 더 부유하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Floating people》 전시 전경(탈영역우정국, 2021) ©허연화

자율적인 네트워크로 보이는 온라인 환경에 담긴 역설적 상황은 전시공간의 기본 구조를 이루는 틀로 전이되었다. 전시장의 주요 동선을 구성하고 있는 벽은 견고한 지지체이기보다는 구멍이 송송 뚫린 벽과 다소 헐거워 보이는 메쉬 구조 펜스의 조합이었다. 그리고 이때 벽체는 관객의 동선을 유도하지만 전면과 후면의 구분이 없으며 동선 또한 열려 있어, 인터넷 브라우저처럼 유동적인 구조를 만들어 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서 마주하는 벽면에는 3개의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그 주변에는 지하철, 유리잔, 하늘, 핸드폰을 든 손과 같은 이미지들이 뒤섞여 있었다. 여기서 구멍은 단지 공백이나 틈새로서 단순하게 남겨지는 것이 아닌, 블록체인의 구조처럼 그 자체로 한없이 불안정한 상태로서 파편들과 연결되어 다음 사건으로 넘어가는 통로가 된다.


허연화, 〈Body〉, 2019, 플라스틱 점토, 시바툴, 40x48x40cm, 《Floating people》 전시 전경(탈영역우정국, 2021) ©허연화

서로 간의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각 작업들은 작가의 일상 속 이미지, 단상, 사건의 파편들이 담긴 조각, 회화, 설치, 출력물 등 형식적 경계 없이 등장했다. 가령, 목재 구조물 위에 배치된 조각은 매핑된 이미지의 매끄러운 질감과 달리 과잉된 신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신체 이미지를 부분적으로 재현된 것들로, 형태는 왜곡된 채 다양한 물질들의 조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접힘과 펼침, 그리고 다양한 질감이 교차하는 그의 조각 작업들은 물질성과 비물질성, 평면과 입체, 현재와 과거, 고전과 동시대성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그 물성으로 재해석해 낸다. 전시장 한쪽에 설치된 접어서 만든 도형 조각들은 맵핑 데이터를 프린팅 포맷으로 변환한 후 제작된 것들로, 조각의 물질화를 통해 압축된 시간의 격차를 펼쳐 보인다.
 
이렇게 작가는 가변적인 교류 안에서 부분적인 신체와 사물을 조각의 물질로 소환함으로써 일상에서의 부유하는 감각을 그려내고자 하였다.


허연화, 〈Sailing〉, 2022, 메시 펜스, 천에 디지털 프린트, 조명, 로프, 석고, 에폭시, 유리, 스테인리스 스틸, 가변크기 ©허연화

이처럼 허연화는 규모가 크거나 다양한 층위에 있는 시공간을 압축하여 보여주는 일에 관심을 가져오며, 무한한 공간(개념)을 유한한 인터페이스 안에 담아내는 방식을 찾아가면서 평면과 입체, 데이터와 물질 사이를 횡단해 왔다.
 
그는 경계와 구획 없이 구성될 수 있는 데이터-공간의 속성에 주목해, 이를 서로 다른 복수의 공간 이미지들이 담긴 다면체나 주름진 평면 등의 작업에 적용해 왔다. 이러한 유동적인 감각의 물질화는 그가 작업 초기부터 관심을 가져왔던 경계 없이 흐르는 물질인 ‘물’에 대한 작업과 연결된다.


허연화, 〈벼락 맞은 날〉, 2022, 페트지, 천에 디지털 프린트, 조명, 로프, 석고, 에폭시, 실리콘, 유리, 스테인리스 스틸, 캔버스에 아크릴릭, 가변크기, 《inter-face》 전시 전경(페리지갤러리, 2022) ©허연화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은 ‘연결’에 대한 감각과 연관된다. 2022년 작업인 〈벼락 맞은 날〉에 등장하는 벼락 또한 연결의 비유로 이해될 수 있다. 이 작업은 번개와 나뭇가지와 모세혈관의 뻗어나가는 형태가 닮아 있음을 새삼스레 자각하면서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느끼게 된 어느 날의 기억에서 출발했다.


허연화, 〈Blur face〉, 2021, 실리콘, 레진, 조명, 유리, 스테인리스 스틸, 카라비너, 로프, 150×80×85cm, 《inter-face》 전시 전경(페리지갤러리, 2022) ©허연화

이는 작가가 각각 다른 시기에 제작한 투명한 오브제와 산호를 그린 그림, 뿔 조각 등을 하나의 공간 안에서 구성하는 시도로 이어졌다. 이러한 다매체 설치작업에서 작가는 단지 경계 없음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벼락이라는 소재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오히려 다른 시공간에서 양립할 수 없다고 여겨졌던 것들을 연결하면서 발생하는 낙차와 생경한 감각을 전면에 드러낸다.


허연화, 〈Cycle〉, 2023, 캔버스에 아크릴릭, 수정, 산호, 테라코타, 레진, 석고, 실리콘, 플라스틱 점토, 모래, 광물, 철사, 유리, 조명, 가변크기, 《제23회 송은미술대상전》 전시 전경(송은, 2023) ©허연화

과거의 작품을 새로운 서사 안으로 끌어들여 연결시키는 시도는 각 작업이 제 쓰임을 지니고 순환 속에 놓이는 일에 대한 작가의 고민을 바탕으로 한다. 그 예로, 2023년 《제23회 송은미술대상전》에서 선보인 〈Cycle〉은 2021년 개인전 《Floating people》의 조각 작업을 새로운 조각의 뼈대로 재사용한 결과물이다.
 
그리고 작가는 이 뼈대에 수정, 광물, 산호 등의 자연물과 산업 재료들이 붙으며 재구축되는 광경을 상상하며, 계속해서 변주되고 순환 속에 놓이는 상황을 만들어 내고자 했다. 이때 산호초가 해양 생태계에서 뼈대 혹은 폐 역할을 맡으며 외부로 구축되고 확장되는 모습, 그리고 환경 보호를 위해 투입된 인공 구조물에 산호가 이식되어 성장하는 모습이 상상의 토대가 되었다.


허연화, 〈Cycle〉, 2023, 캔버스에 아크릴릭, 수정, 산호, 테라코타, 레진, 석고, 실리콘, 플라스틱 점토, 모래, 광물, 철사, 유리, 조명, 가변크기, 《제23회 송은미술대상전》 전시 전경(송은, 2023) ©허연화

이렇게 만들어진 설치 작업은 물의 이동을 주제로 하며, 급진적이고 유동적으로 변해가는 환경에서 퇴적되는 존재들을 다룬다. 물의 순환 중 일부분인 벼락을 시각 장치로 활용하고 산호가 해양 안 생태계에서 구축되는 방식을 드러냄으로써, 자연 현상에 계속해서 변수를 만들어내는 것들의 매개와 퇴적을 통해 기존의 형태가 변화되고 또 새롭게 변주되는 생성이 다시 전체에 합류되어 순환고리가 되는 동적인 상황들을 표현한다.
 
이로써 중심에서 뿌리로 뻗어 나가는 형태적 유사성을 가지는 벼락과 산호는 상호 간의 연결점을 제공하며 하나의 유기체와 같은 이미지를 상기시킨다.


《푸른 폐》 전시 전경(갤러리밈, 2024) ©갤러리밈

이듬해 갤러리밈에서 열린 개인전 《푸른 폐》에서도 작가는 산호의 풍경을 통해 변주와 퇴적에 대해 다뤘다. 산소를 들이고 이산화탄소를 내뱉는 순환을 통해 유기체의 동적인 변화를 지속시키는 폐라는 기관처럼, 전시 《푸른 폐》는 순환과 변화의 과정 속에 놓인 작업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시를 이루는 작업에는 과거의 신체 조각과 유동적 배경의 회화가 재등장했다. 〈Viewport〉(2017)와 〈Floating People〉(2022) 외의 신체 형태의 조각들이 토대가 되고, 그 구조 위에 수정, 광물, 산호와 같은 자연물과 산업 재료들이 붙어 재구축 된다. 또 물의 텍스처로만 존재하던 회화 작업들은 시간차를 두고 여러 레이어가 쌓인다.


《푸른 폐》 전시 전경(갤러리밈, 2024) ©갤러리밈

이처럼 허연화는 물리적 한계가 해소된 환경에서의 물과 같은 유동적인 물질과 신체에 대한 관심을 평면과 입체로 시각화해 왔다. 이때 그의 작업에서 위치를 달리하며 공간을 점유하고 있던 작품은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고 제 쓰임을 가진다. 또 변칙적인 사건을 통해 새롭게 생성된 변수가 다시 하나의 퇴적물이 되어 기능 되고 재변화의 가능성을 갖는다.
 
매체의 제약에서 벗어나 다층적인 감각을 내포하고 있는 그의 작업은 보는 이로 하여금 일상 속 끊임없이 유동하는 다양한 관계성에 대해 사유하도록 하며, 지속 가능한 작품과 물질성에 대한 고찰로 이끈다.

 ”변화의 가능성을 지닌 상태, 경계가 없고 구획되지 않은 공간감, 단정 지어질 수 없는 입장, 언제라도 허물어지거나 결합할 준비를 마친 유동적인 것.”   (허연화, 비애티튜드 인터뷰 중) 


허연화 작가 ©허연화. 사진: 정영호.

허연화는 홍익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했다. 주요 개인전으로는 《파동의 수피》(부천아트벙커 B39, 부천, 2025), 《푸른 폐》(갤러리밈, 서울, 2024), 《수영의 시간》(갤러리민정, 서울, 2022), 《Floating people》(탈영역우정국, 서울, 2021), 《Summer squeeze》(전시공간, 서울, 2020)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부드럽게 걸어요, 그대 내 꿈 위를 걷고 있기에》(대전시립미술관, 대전, 2025), 《Ecocycle》(KORNFELD Galerie Berlin, 68projects, 베를린, 2025), 《제23회 송은미술대상전》(송은, 서울, 2023), 《The other Face of Material》(서정아트, 서울, 2023), 《inter-face》(페리지갤러리, 서울, 2022), 《이공간, 그장소: 헤테로토피아》(대림미술관, 서울, 2020)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한 바 있다.
 
허연화의 작품은 양평군립미술관 및 서울시 박물관과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