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대도시의 일상이 된 보는 경험이 단순히 재현의 산물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과 사건으로 형성된다고 결론 내린다. 소외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소비자라고 생산자보다 크게 나을 것도 없다. 임희재가 선택한 자연사 박물관 속의 박제는 자연, 수집, 예술작품, 상품 등에 두루 적용될 수 있는 시각적 관습을 건드린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 모두에 깔린 공통적인 것은 결국 인간의 욕망이다. 가상의 소유 또는 향유를 위해서 대상을 굳이 고정시킬 필요는 없다. 요컨대 실제를 죽일 필요가 없다. 예술은 나름대로 평화의 사도이다. 회화적 터치가 살아있는 임희재의 작품들은 하나의 대상으로도 무한히 다양한 변주 나올 수 있다. 물론 작가는 국내외 자연사 박물관 등을 수없이 방문하고 작가만의 리스트 또한 있지만, 그것들은 단지 그림을 그리기 위한 단서일 뿐이다. 작품 속 박제들은 최초의 출발이자 최종적인 산물과 관계된다.
지시대상이 흐릿하게나마 남아있는 것은 우선 작가가 화가가 되기 전에 심미적 체험을 안겨주었던 도감이나 자연 수집물과 관계된다. 작가는 어릴 때부터 동물도감을 좋아했다. 살아있는 듯한 도감 속 이미지는 생명의 원형같이 다가왔다. 그것을 따라 어린 임희재는 곤충이나 식물들을 채집해 오기도 했지만, 실제보다는 이미지가 더 좋았다. 하지만 이미지는 실제와 달리 잡히지 않는다. 만질 수 없는 대상으로서의 자연은 이전 작품에서 광고 속의 자연물을 그렸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가상적 이미지를 쥐고 싶었던 아이는 커서 화가가 되었지만, 회화 또한 끝없는 과정임을 깨닫는다. 이번 전시 작품들의 소재는 ‘허상 속에 살아있는 것’, 하지만 ‘상황적으로 죽어 있었던 것’이다. 자연이 아닌 이미지에 집중하는 작가는 관찰자와 대상 사이에 있는 진열장의 유리를 의식하게 된다. 임희재의 작품은 박제라는 대상 보다는 진열장의 유리창에 맺힌 박제의 상들에 주목한다.
박제는 완전한 이미지와도 다른 사물의 속성을 띄고 있기에 회화적 게임은 훨씬 복잡해진다. 실제가 아닌 도감 속의 이미지에 매혹되었다는 점은 임희재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대목이다. 하지만 관찰자를 온통 몰입하게 하는 매혹하는 것의 실체는 모호하다. 모호한 것은 허구나 기만, 거짓으로 여겨지지만, 동시에 다양한 양태를 가지기에 유희적이다. 니체가 진리보다 가상이 더 좋다고 말한 것은 그의 예술가적인 기질 때문일 것이다. 작품 속 박제들은 원래 묵직했을 것이지만, 임희재의 작품에서 연기처럼 가볍게 처리된다. 지시대상이 있지만 불분명하게 제시된 작품들은 진리와 가상의 관계를 묻는다. 원본을 정확하게 재현한다는 불가능하고 불필요한 기획을 포기하면 가상, 즉 시뮬라크르의 유희가 시작될 수 있다. 질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이데아적인 원형을 중시했던 플라톤의 재현적 철학에 대항하여, 시뮬라크르는 퇴락한 복사물이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원본과 복사본, 모델과 재생산을 동시에 부정하는 긍정적 잠재력을 숨기고 있다고 평가한다.
들뢰즈는 시뮬라크르들의 효과를 환각(phantasme)이라고 본다. 들뢰즈는 ‘시뮬라크르들은 관찰자의 관점을 포함하는 구성물들이다. 그래서 관찰자가 존재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환상이 생겨난다... 사실상 강조점이 두어지는 것은 비존재의 지위가 아니라 이 작은 간격, 실제 그림자의 이 작은 뒤틀림이다’(오두아르)는 분석을 인용한다. 이러한 환각을 통해서 ‘가장 깊숙이 은폐되었던 것이 가장 밝은 곳으로 올라오고, 생성의 모든 오래된 역설들이 새로운 청춘 속에서 모양새를 갖춘다.’고 말한다. 시뮬라크르는 재현주의와 대조항을 이루면서 깊이가 아닌 표면, 원본이 아닌 변이, 표상이 아닌 생성을 강조한다. 데이비드 서머스는 〈현대 문학, 문화 비평 사전〉(조셉 칠더즈 외, 문학동네 출판사)의 ‘재현(representation)’ 항목에서, 들뢰즈를 따라 시뮬라크르의 환영(phantasia)적 속성을 강조한다. 데이비드 서머스가 해석한 바에 의하면, 시뮬라크르는 ‘의견을 형성하는 능력 이상의 것, 말하자면 부재하거나 불가능한 사물을 영혼의 빛으로 비추어 우리 자신에게 재현해 보이고 기억하고 상상하고 꿈꾸는 능력’이다.
박제라는 소재는 수집가나 생물학자, 그리고 화가와 관람자 모두에게 자연을 인식하는 것의 문제와 닿아있다. 임희재는 그것을 화가의 방식으로 펼친다. 그동안 작가는 ‘회화 공간 간의 만남’을 다루는 ‘Cabinet’ 시리즈, ‘얼굴과 시선의 만남’을 다루는 ‘Faces’ 시리즈, 그리고 ‘전시 공간과 회화 공간의 만남’을 다루는 ‘Stuffed’ 시리즈에 집중해왔다. 이번 전시의 메인 작업인 ‘Stuffed’의 회화 작업들에는 ‘Cabinet’, ‘Faces’, ‘Stuffed’ 세 가지 시리즈의 초점을 모두 조금씩 녹여냈다.
작품 〈Four Antelopes in the Cabinet〉는 캐비닛 속의 영양들을 보여준다. 몇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수납장인데, 어느 층은 다리만 어느 층은 상반신만 보인다. 가운데 층은 온전히 보인다. 비슷한 크기와 형태라서 마치 그 내부에서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다. 그것은 정지된 매체인 회화가 동감을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작가는 동물을 그리지만 애초의 모델이 박제인지라 결코 기운생동할 수는 없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흔적인지라 사물과도 다르다.
글자가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학명이 있는 명패를 달고 있는 이 존재들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질서 어딘가에 자리한다. 글자가 보여도 뭔지 모를 오래된 언어로 붙여졌을 학명은 대상만큼이나 낯설테지만, 어쨌든 그것은 인간의 체계이다. 필립 블롬은 〈수집, 기묘하고 아름다운 강박의 세계〉에서 수집의 메커니즘을 사적인 것에서 공공적인 것으로 확장시키면서 자연사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공히 적용될 수 있는 체계를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미술관에 처음 발을 들여놓는 순간 하나의 체계와 교훈, 분류법을 배운다.’고 전한다. 이러한 시스템에 의하면 배치가 바로 유파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정작 자연은 체계화도 언어도 알지 못하며 의지와 목적을 가지지도 않는다. 작품 속 동물 앞에는 어떤 존재의 위치를 가리키는 명패가 있지만, 작가는 그것을 거의 지우다시피 한다. 존재와 이름은 서로에게 소원하다. 인간의 체계화에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자연은 거기에 완전히 속해지지 않는다.
자연사 박물관이 재현하려는 방식에서 조금씩 어긋나는 작가의 표현법은 대상들이 자신들만의 질서를 가진 듯 보이게 한다. 박제는 최대한 원래의 생물체에 가깝게 재현된 것이기에, 작가가 ‘사실주의’ 기법에 의해 박제를 그대로 재현했다면 어떤 관객은 이 그림을 보고 ‘저것은 영양이야’ 또는 ‘영양의 박제야’라고 말할 수도 있다. 현대는 마그리트와 푸코가 문제 삼았던, 말과 사물의 간극이 무시되는 상황을 극복하려 했다. 현대의 언어는 대상을 투명하게 비춰주는 창이 아니라, 그 자체의 존재감을 가진다. 얇은 층들이 중첩되어 형태와 색채를 암시하는 임희재의 화법은 선적 묘사에 비해 불투명하다. 작가가 어릴 때 깊은 관심으로 바라보던 생물 도감의 재현양식과는 크게 다르다. 작가는 주어진 또는 선택한 대상을 자세히 묘사하는데 집중하지 않았다. 흐릿하게 처리한 방식은 오히려 박제의 정지된 느낌을 배제하고, 오히려 미묘한 생동감을 준다.
부분적으로 푸르른 배경과 연결되어 영양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그것은 작가만의 독특한 회화적 처리에 의한 부대 효과일 따름이다. 나무로 만들어진 고색창연한 캐비닛이라는 틀은 그것이 박제된 대상임을 잊지 않게 한다. 모든 것이 코드를 통해 환하게 까발려지는 시대, 고풍스러운 수납장은 그 안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를 미지의 영역같다. 하지만 그것은 화가의 시선을 통해서 개방되었고, 관객은 작품이 유도하는 방식에 의해 보여진 대상과 상호작용하게 된다. 투명한 언어가 구사되지 않았기에 대상은 관객 앞에 온전히 대령된 것이 아니다. 제일 아래 칸의 영양은 박제된 상이라는 맥락 때문인지 태어난 그대로(종교를 가진 사람이라면 창조된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는다. 박제를 제작한 이는 죽은 동물의 생동감을 위해 눈의 재현에 힘을 쏟는다. 살아있는 듯 까만 눈동자 이외의 부분은 대상과 배경의 경계가 모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