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정, 2023 프리즈 서울 ‘포커스 아시아’ 섹션 전시 전경 ©정수정

정수정의 회화는 과거를 변주하고, 클리셰를 뒤집고, 통념을 비틀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쓴다. 이질적 존재, 낯선 존재, 소외된 존재가 주인공이 되어 세계를 뒤집고 헤쳐 나가는, 전례 없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새롭게 쓰는 생태적 공동체
 
그동안 정수정은 다양한 모습의 여성을 그려왔다.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작품을 참조하여 여성 님프가 뛰어 노는 새로운 에덴동산을 그리고(《Sweet Siren》, 2018), 대중문화 속 빌런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강력한 여성 악당을 그렸으며(《빌런들의 별》, 2020), 17세기 네덜란드의 인물화 장르 트로니를 참조하여 동물과 결합한 여성들의 초상을 그렸다(《Falconry》, 2021).

이번에 선보이는 신작 〈Voyage〉에는 상상 속 세계에서 자유롭게 부유하는 여성들이 등장한다. 하늘을 날거나 바다를 유영하는 것처럼 보이는 여성들은 어떠한 얽매임도, 갇힘도 모른다는 듯이 힘차게 나아간다. 교복을 입은 여성,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성, 수영복을 입은 여성은 우리의 일상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현실과는 다른 자유로운 세계에서 시원하게 물살을, 공기를 가로지른다. 먹음직스런 과일부터 기이한 형태를 하고 있는 포자와 플랑크톤에 이르기까지 세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미시적 존재와 뒤섞여 유희하는 여성들은 오랜 시간 우리의 상상과 함께 자라온 여신 혹은 요정, 마녀의 후손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세계에서 이질적 존재, 낯선 존재는 더 이상 소외된 존재가 아니다. 작은 미생물부터 기이한 초능력자까지 다양한 생명체가 서로 어우러지고 교류한다. 정수정은 이들이 뒤얽혀 있는 이미지로 새로운 서사를 써 내려감으로써 현실과는 다른 이상적이고 대안적인 생태계를 창조한다. 


 
관습을 뒤집는 회화의 충동

정수정은 고전과 동시대의 레퍼런스를 매끄럽게 뒤섞어 현재의 여성에 관해 이야기한다. 초상화, 기독교 삼면화 같은 미술사의 오랜 관습을 참조하고, 영웅의 모험, 선악의 구조 같은 서사의 오랜 모티프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 여기에 웨딩드레스, 교복, 하이힐처럼 동시대 대중문화에서 반복되는 여성적요소를 자연스럽게 뒤섞는다. 

이때 여성의 시각적 요소에 대한 끌림은 자칫 여성을 대상화할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정수정의 여성들은 그게 무어냐고 비웃기라도 하듯이 전형적인 여성의 도상을 뒤집는다. 아름다울 것 같은 초상화의 여인은 마냥 아름답지 않고 낯설거나 기괴하다. 나체의 여성도 여성적이나 관능적이지 않다. 전형적인 아름다움의 형태를 닮았으면서도 그것을 따르지 않고 뒤집어서 예상치 못한 감각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의 어떤 모티프를 참조하여 회화를 어떻게 현재화하고 있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수정의 작업을 이끄는 강력한 충동이다. 정수정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린다. 아주 강력한 욕망에 따라 자유롭고 강력하고 아름다운 여성을 그린다. 그 욕망은 커지고 또 커져 더욱 자유롭고 강력하고 아름다운 여성을 그리기 위해 현실을 벗어나 환상적 세계를 만들어낸다. 여성을 가두는 현실적 제약을 부숴버리겠다는 듯이 정수정은 환상적 세계를 거침없이 그려낸다. 그녀의 붓은 머뭇거리지 않는다.

정수정은 현실이 겨우 도달한 곳을 넘어서서 더 환상적인 세계를 제시한다. 현실이 한 발짝 나아지면 정수정의 회화는 두 발짝 더 멀리 나아갈 것이다. 앞으로 그녀의 그림에서 더 강력하고 자유롭고 아름다운여성을 만나기를 소망한다. 그것이 그나마 세계가 조금은 나아졌다는 것의 방증일 것이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