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선구(b. 1990)는 종이와 흑연을 기반으로 크고 작은 이야기의 단위를 만들고, 이를 견고하게 엮어 입체적인 서사를 구축해 나간다. 작가는 개인적인 경험 속에서 포착한 삶의 언저리에 편재하는 삶과 인물의 흔적들을 드로잉의 어법으로 서술하며, 화면 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조율하고 한 걸음 물러나 바라보는 작업을 반복해 왔다.

임선구, 〈이상하고 평화로운 날들이었다〉, 2017, 종이에 흑연, 45x130cm ©임선구

임선구의 화면 속 언뜻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도상들은 모두 그의 기억을 공통분모로 삼아 모여든 것들이다. 작가는 기억의 파편들을 깁고, 구기고, 콜라주 하며 방랑하던 서사들이 유기적으로 공생하도록 화면을 조율하고, 이로써 만들어진 연약하면서도 사소한 풍경들을 모아 세계의 다면성을 이야기한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종이, 흑연, 모래와 같이 쉽게 변형되거나 흩어지는 물성을 지닌 재료를 사용한다. 이러한 재료들의 물성은 기억 속에 자리한 파편들을 화면 위로 그러모으는 작가의 행위와 만나 그림 속 세계의 은유로 작용한다.


임선구, 〈우리는 검은 산 구석에 모여〉, 2019, 종이에 혼합재료, 98x150cm ©임선구

작업 초반, 임선구는 그리는 순간 부서지며 흩어지는 연필의 특성과, 조율 방식에 따라 다양한 온도와 느낌으로 다가오는 연필의 색을 작업에 어떻게 적용할지에 대한 고민을 지속했다. 그의 첫 번째 개인전 《종이위의 검은모래》(갤러리 조선, 2019)는 작가가 흑백 드로잉을 하면서 느끼는 일련의 과정들에 관한 자유로운 생각들을 주제로 한다.

《종이위의 검은모래》 전시 전경(갤러리 조선, 2019) ©임선구

임선구는 흩어지는 성질을 지닌 흑연과 모래를 사용하며 ‘무엇을 나타낼 것인가’와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의 사이에 놓인 긴장을 조율하고, 이미지를 통해 이를 하나의 덩어리로 꿰어내고자 했다. 드로잉들은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무수한 조형적 시도의 반복으로도 읽힌다. 

4년 간 진행한 작업을 선보인 전시 《종이위의 검은모래》는 연필의 흑연을 녹이거나 문지르고 긁어내던 초기 에스키스부터 오일파스텔, 잉크 등을 활용한 콜라주까지, 재료연구를 바탕으로 형식에 관한 작가의 실험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종이위의 검은모래》 전시 전경(갤러리 조선, 2019) ©임선구

또한, 이러한 그의 드로잉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은 평면을 채우고 있는 구도와 시점이다. 그는 움직이는 상황들을 정지시킨 여러 장면들을 화면 안에 무작위로 배치시킨다. 공간과 인물을 뒤섞는 이러한 과정은 작고 멀리 있는 대상의 표정까지도 놓치지 않는다.  

인물이 가진 표정과 몸짓, 건축물의 그림자까지 포착하며 만들어낸 특정한 풍경은, 당시의 분위기까지도 고려하며 아주 세밀하게 구성된다. 이후 작가는 무관한 장면들 간의 연결, 즉 이미지들을 병치시키면서 새로운 감정들을 불러일으키는 화면을 만들어 낸다.


임선구, 〈우리는 검은 산 구석에 모여〉, 2019, 종이에 혼합재료, 98x150cm ©임선구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들 간의 서사는 마치 다양한 세계관, 상황, 인물, 주제 등을 공유하는 옴니버스처럼 연결된다. 선형적이지 않으며 다소 산발적이지만 나열 그 자체로 형성되는 무한한 경우의 수들은 이미지를 바라보는 이들의 내면 깊숙이 머무르는 기억들을 건드린다.  

전시 서문에서 천미림 큐레이터는 이에 대해 “작가가 현실의 주변부에 관한 감정들을 드로잉으로 옮기는 행위와도 관련이 있다”고 보며, “내부적으로 자신의 기억과 화면을 통한 타자화의 과정을 오가면서 환각적인 이미지를 구성하고, 이는 관객과의 회화적 소통을 통한 의미화를 구현한다”고 설명한다.

《종이위의 검은모래》 전시 전경(갤러리 조선, 2019) ©임선구

가령, 2017~2019년도 사이의 이미지들의 B컷을 기록한 작업을 모은 작가의 드로잉 북은, 전시장의 드로잉들을 확대하거나 중복적으로 그려낸 대상들을 담으며 관객으로 하여금 그림들 사이를 연결 짓거나 조합해보는 능동적 경험을 이끌어 냄으로써 각자만의 내면에 자리한 감정들을 불러일으킨다.

《이상하고 평화로운 날들이었다》 전시 전경(학고재 디자인 프로젝트 스페이스, 2020) ©임선구

이처럼 파편적인 장면에 각기 다른 제목을 붙여 드로잉을 해온 임선구는, 2020년 학고재 디자인 프로젝트 스페이스에서 열린 개인전 《이상하고 평화로운 날들이었다》에서 하나의 장소에 대한 이야기들을 애니메이션의 형식으로 묶어 보여주었다.
 
네 편으로 나누어진 영상 작업 ‘숨은 산’(2020)은 작가가 오르던 선산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다.영상은 물감과 흑연이 만났을 때의 효과를 관찰하며 그린 드로잉 연작을 애니메이션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 드로잉 연작에서 작가는 산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일들, 예를 들어 신부님이 미사를 드리는 도중에 옆에서 돌을 쌓고 있는 장면 등을 그렸다.  

영상은 돌무덤이 흩어졌다 제자리로 돌아오는 장면과 함께 새가 같은 궤적을 반복해 날고, 사람은 쉼 없이 노동하는 모습이 펼쳐진다. 인물과 짐승, 어둠 속 섬광이 어우러지며 기묘하고도 아름다운 풍경이 된다.

《보이지도않는꽃이: 발자국을 발굴하기》 전시 전경(SeMA 창고, 2022) ©임선구

이러한 형식과 연출에 대한 실험은 2022년 SeMA 창고에서 열린 개인전 《보이지도않는꽃이: 발자국을 발굴하기》에서도 이어졌다. 전시는 이상의 시 「절벽」의 마지막 문장에서 시작한다. 임선구는 흩어지는 것들을 끌어 모으는 자신의 예술적 행위가 보이지 않는 꽃을 찾아 헤매는 「절벽」 속 화자의 행적과 맞닿아 있음에 착안하여 전시를 구성하었다.

《보이지도않는꽃이: 발자국을 발굴하기》 전시 전경(SeMA 창고, 2022) ©임선구

이에 SeMA 창고를 하나의 화면으로 상정하고, 본인의 드로잉 안팎에 늘 존재하던 요소들을 입체적으로 배치하여 발화를 시도했다. 두 개의 공간으로 구성된 전시장에는 형상과 비-형상을 오가는 흑연 드로잉과 콜라주가 설치되었다.  

파편들로 재조합된 드로잉들을 터널 형태로 설치한 4전시실은 목조 격자에서 분리되어 관객을 마중 나온 것처럼 보인다. 마주보는 드로잉들은 발걸음에 따라 가까워지고 또 멀어지며 SeMA 창고에 펼쳐진 작가의 이야기 세계를 드나드는 입구이자 출구로 기능하였다.

《보이지도않는꽃이: 발자국을 발굴하기》 전시 전경(SeMA 창고, 2022) ©임선구

5전시실은 종이 바닥을 밟고 올라서서 천장과 목조에 날아다니듯 걸려있는 드로잉들을 다양한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가상의 신화를 현실의 공간 속에 구현하듯이, 과감하게 찢어 붙인 종이로 거대한 부엉이와 나비, 전설 속 동물들, 그리고 그들이 서식하는 숲의 나무와 같은 형상들이 공간을 점유하고 있었다.
 
유연함과 가변성을 드러내는 공간 연출은 관람객의 자유로운 배회와 해석을 유도하면서도 구체적 형태가 드러나기 직전까지 판단을 보류하도록 하며, 다층적인 이야기 여정으로 이끌었다.

임선구, 〈깊은언덕 두번째 샛길2〉, 2022, 종이에 흑연, 혼합재료, 콜라주, 45.2x45.2x5.8cm ©임선구

이렇듯 임선구의 매체 탐구는 흑연에서 멈추지 않고 종이까지 확장되어 왔다. 물리적인 힘을 가하여 종이를 찢어서 기억의 파편화를 시도하거나, 협곡처럼 입체적으로 조합된 파편들은 불규칙한 지형을 형성하여 관객의 자유로운 배회를 유도한다.  

그리고 2022년 신한갤러리에서 열린 단체전 《Touch Stone》에서 작가는 과거의 작업들을 찢어 콜라주한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작업은 ‘이미 만들어 놓은 세계를 접었을 때 무슨 일이 생길까?’라는 작가의 호기심에서 출발한다. 종이에 변형을 가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고, 이로써 새로운 세계의 단면을 창조해 내는 작업으로 발전해 나갔다.


임선구, 〈벽장안의 눈〉, 2023, 종이, 제작종이, 흑연, 혼합재료, 콜라주, 58x66.5x5.5cm ©임선구

이와 더불어, 작가는 평면과 입체 두 형식 사이를 조율하고 있는 듯한 반(半)입체 형태의 작업들을 제작했다. 예를 들어, 2023년 작품인 〈벽장안의 눈〉은 직접 수제 종이를 제작하여 지지체로 활용한 반(半)입체 형태의 드로잉으로, 역사적 유물의 생김새를 연상시킨다.  

작가는 종이를 두껍게 쌓아 돌처럼 굳혀서 틀을 마련하고, 상단에 그물 모양으로 재단한 종이를 덧대어 상자와 같은 형태를 만들었다. 종이 그물 안쪽을 들여다보면, 상자 내부 벽면에 부착한 흑연 그림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작품명이 암시하듯이 어둠 속 어렴풋이 떠오르는 미지의 얼굴들이 바깥 세상의 우리를 거꾸로 응시하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축성법》 전시 전경(금호미술관, 2024) ©임선구

임선구의 종이에 대한 관심은 2024년 금호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축성법》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드러났다. 그간 흩어지고 사라지는 삶 주변부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흑연이라는 물성으로 조율해 왔다면, 전시 《축성법》에서는 늘 밑바탕이 되어 왔던 종이가 전시 공간의 주인공으로 대두된다.  

작가는 이 전시에 대해 “작업 안에서 시끄럽게 이야기했던 많은 이미지들이 벽 뒤로 숨거나, 드로잉 북 안으로 들어가고 전면에 세워지는 성벽들로 그 내부의 서사를 가늠해보는 전시”라고 설명했다.


《축성법》 전시 전경(금호미술관, 2024) ©임선구

전시장을 채우고 있던 벽 구조물들은 종이뿐만 아니라 가벼운 물성을 가진 모든 재료를 뭉쳐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긁어모은 땅, 언덕들, 무너지는 산, 짐승과 새의 얼굴을 빌린 종이 드로잉들이 각각 ‘이야기 형태소’가 되어 벽장이라는 단어를 형성하게 되고, 작가는 이 울퉁불퉁한 종이 벽장의 외곽을 연결해 울타리와 벽이라는 문장으로 연결시킨다.
 
이처럼 임선구의 드로잉은 작가의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 파편들을 흑연과 종이의 변주를 통해 연결하고 다면적인 형태로 구축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오가는 내적경험을 이끌어 낸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보는 이의 내면에 따라 새롭게 읽히며, 무수한 이야기들로 구성된 세상의 다면성과 쉽게 흩어지고 뭉쳐지는 개인의 삶과 기억들을 떠올리게 한다.

 ”평화롭지도 혼란스럽지도 않은 일상이 쌓여서 입체적인 이야기를 형성하고, 그것들이 시선에 따라 다양하게 읽힐 수 있는 세상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임선구, 리윗-리윗 인터뷰 중) 


임선구 작가 ©인천아트플랫폼

임선구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조형예술과 학사 및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주요 개인전으로는 《축성법》(금호미술관, 서울, 2024), 《보이지도않는꽃이: 발자국을 발굴하기》(SeMA 창고, 서울, 2022), 《종이위의 검은모래》(갤러리 조선, 서울, 2019)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협업의 기술》(인천아트플랫폼, 인천, 2024-2025), 《다섯 발자국 숲》(국립현대미술관 어린이 미술관, 과천, 2024), 《서 있을 수 있는 사람》(갤러리 SP, 서울, 2024), 《Maps with PACK》(서울시립미술관, 서울, 2022), 《두산아트랩 2022》(두산갤러리, 서울, 2022), 《아이콘》(학고재, 서울, 2021)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임선구는 인천아트플랫폼 14기 레지던시 입주 작가로 활동하였으며, 프리즈 서울 2025 ‘포커스 아시아’ 섹션에서 드로잉룸과 함께 솔로 프레젠테이션을 선보인 바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