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llation view of 《At the Edge of Atlas’s Shoulder》 © GalleryMEME

낮과 밤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서 우주의 기둥을 떠받들고 있는 아틀라스, 그는 크로노스의 편에 서서 올림포스의 신들에 대항하는 전쟁에 참여했다가 패배하자 제우스로부터 영원히 천구를 떠받드는 형벌을 받게 된 것이다. 크로노스가 수호한 시간은 통제 불가능하며 고정되고 순차적인 시간으로, 즉 운명의 굴레라고 볼 수 있다. 1)

제우스는 크로노스를 몰아내고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려는 존재로 변화 가능한 시간과 운명 속의 기회를 다룬다. 티타노마키아라고 불리는 티탄족과 올림포스 신들의 전쟁에서 크로노스의 편에 섰던 아틀라스는 구시대의 질서를 고수한 존재가 아닌가.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현재의 질서를 지탱하고 지지하는 존재가 되었다.
 

 
1585년에 발간된 게라르두스 메르카토르(Gerardus Mercator)의 지도 시리즈의 표지 삽화로 아틀라스의 이미지가 사용되었고,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아틀라스라는 용어는 체계화된 지식을 도표 형식으로 정리한 책을 지칭하게 되었다. 2)

그러나 메르카토르가 참고한 아틀라스는 고대 전설에 나오는 지리학과 천문학에 해박한 현자이자 통치자였던 마우레타니아의 아틀라스였다. 시간이 흐르며 이 상징은 신화적 형벌을 받은 티탄 아틀라스의 이미지와 뒤섞였고, 아틀라스는 지식을 짊어진 존재로 문화적 이미지가 굳혀져 구조화된 정보의 시각화를 뜻하게 되었다. 

예컨대 문화사학자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는 아틀라스를 이미지와 기억을 몽타주 한 시각적 아카이브 방식으로 전유하였고, 조르주 디디-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은 아틀라스 개념을 시각적 사유의 방식으로 이어받았다. 아틀라스라는 개념은 신화 속 인물에서 출발하였지만 여러 다른 맥락 속에서 변화하고 중첩되어 그 의미는 확장 · 전유되었다.

조은시, 〈넷이 하나〉, 2025, 판넬에 유채, 80 × 46 × 63 cm © 갤러리밈

형벌에는 필연적으로 고통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아틀라스 역시 땀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 하중과 맞닿아 있었던 그의 어깨 끝에서 난 땀은, 천구 표면에 미세한 미끌거림을 만들고 균열을 남겼을 것이다. 그리고 그 균열 사이에는 기존의 질서로는 수렴되지 않는 새로운 간극이 생겨났을지도 모른다. 견디는 자였던 아틀라스가 신화적 기원에서 벗어나 오해와 문화적 해석을 거쳐 구조화의 상징으로 재구성되었다가, 새로운 의미의 틈을 열어젖힌 존재가 된 것처럼 말이다. 조은시는 이번 전시에서 안정적이고 체계적으로 보이는 세계 안에서의 차이와 어긋남을 세심하게 포착한다.

조은시의 아틀라스는 이미지와 기호, 상징들 간의 관계와 반복을 통해 관람객에게 감각적 사고를 유도한다. 이미지의 친연성, 그리고 기호와 오인 사이의 관계는 그의 작품 저변에 흐르는 중심 해석 구조이다. 〈땅속 형제〉, 〈땅위 형제〉는 한 화면 위에 씨앗 혹은 알이 병렬적으로 놓여 있다. 씨앗과 알, 두 기호는 앞으로 개별적으로 의미가 전개될 것임을 암시하는데, 특히나 씨앗의 성장 양상의 다름이 이를 분명히 드러낸다. 이처럼 형태는 닮았지만 운명은 전혀 다를 수 있는 존재들을 반복적으로 배열하여 다중적인 시간과 해석을 잠재적으로 품고 있음을 보여준다.

〈착각〉은 자신을 닮은 그림 앞에 홀로 서 있는 계란을 그린 그림이다. 드로잉북 혹은 노트 위에 그려진 흰색 계란이 본인이라 착각하고 서 있는 갈색 계란을 통해 시각적 자기 인식이 얼마나 불안정한지에 대해 유머러스하게 드러내면서 동시에 이미지와 실재,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착란을 나타내기도 한다. 재현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계란 한 판이 그려진 드로잉북은 달력의 모양을 하고 있어 정체성의 추상적 기호들이 이미지로 배치되고, 또 달력의 한 달과 계란 한 판, 서른 살이라는 이중적 기호로 기능하기도 한다.

조은시, 〈땅위 형제〉, 2025, 판넬에 유채, 35 x 70 cm, 〈땅속 형제〉, 2025, 판넬에 유채, 35 x 70 cm © 갤러리밈

〈중심 연구〉에는 거스를 수 없는 운명과, 필연에 대한 저항이 공존한다. 쇠 행거를 중심으로 앞뒤로 나뉘어진 캔버스 천은 그 아래에 걸린 추로 인해 균형을 이룬다. 그러나 이 균형은 결코 고정적이지 않으며, 추의 위치와 천의 긴장에 따라 미세하게 흔들리는 유동적인 구조다. 이 작품은 원래 허들 모양을 하고 있는 세 작품과 한 세트로 구성되었다. 허들 작업의 양면에는 상반된 내용을 가진 속담의 상징물이 그려져있다. ʻ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계란으로 바위치기’ / ʻ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ʻ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와 같이 모순되는 속담이 그려져있는데, 이는 언어로 정립된 질서조차 충돌하는 다양한 관점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모순되는 속담이 존재한다는 건 어떤 상황에도 꼭 맞는 하나의 정답, 즉 필연적 진리는 없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셈이라 할 수 있다. 삶은 단순하게 인과적으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돌과 돌산, 사막과 모래성과 같이 이미지 간의 친연성, 그리고 균형추를 통해 안정적인 중심과 균형의 의미를 구축하면서도 위태로운 공존이었듯, 허들 작품을 통해 숙명론적인 태도에도 무의식적으로 반발한다.

아틀라스라는 하나의 단어에서 여러 맥락이 쌓이고 여러 의미가 파생되었듯, 조은시의 아틀라스 역시 단일한 내러티브와 의미를 생성하기보다는 복수의 방향으로 의미를 분산시키고 확장한다. 땅 혹은 둥지, 어미 새와 같이 동일한 기원을 갖지만 동일한 결과로 수렴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기본적으로 오인을 바탕으로 그려지고 유도하며, 긴장과 유희를 섞어 정체성과 재현을 유머러스하게 흔든다. 해석의 단일화를 유예하는 시각적 장치로 작용하며 전체 속에서 튀는 개인과 다름이 드러나는 순간을 포착하여 우리 앞에 내보인다.
 

1) 태초의 신 중 하나이자 시간의 신으로 알려진 크로노스(Chronos, Χρόνος)와 티탄족의 왕 크로노스(Cronus/Kronos, Κρόνος)는 작물, 계절, 노화 등과 연관된 신으로 고대에는 다른 신이었다. 유사한 발음으로 인해 이 둘의 존재는 뒤섞이기 시작했고 로마 후기와 르네상스 미술에서 동일시하거나 상징적으로 연결해 해석되었다.
2) Benjamin H. D. Buchloh, “Gerhard Richter’s “Atlas”: The Anomic Archive, October, Vol. 88 (Spring 1999). 119-122.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