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현은 지난 개인전에서 컴퓨터 프로그램 속 입체와 미니멀리즘 조각을 병치시키며 허구적
물질로서 전시와 조각을 경험하는 역설적 장면을 연출했다. 허구와 실제,
평면과 입체를 양분하지 않는, 하지만 분명한 낙차를 드러낸 작업은 이번 전시에서 야외 앞마당으로
그 무대를 이동시킨다. 컴퓨터 프로그램 상의 입방체를 정해진 규칙에 따라 기하학적으로 재구성한 듯한
〈Trinity〉(2021)는 흔히 볼 수 있는 미니멀리즘
조각을 단순 변형한 것으로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스크린 상의 평면-입체와
미니멀리즘의 병존이 아닌 보다 분명한 지각적, 경험적 물질의 생성을 추구한다. 스크린과 미니멀리즘의 정면성과 평면성은 실제 작업에서 사선과 반측면으로, 각기
다른 질감과 색감, 동세로 대체된다. 같은 조각 세 개를
다른 형태로 나란히 놓는 행위는 반복성과 연극성의 역사적 사례들을 호출하고, 이는 다시 작업이 포개
놓는 혹은 고의적으로 충돌시키는 복제 가능한 스크린과 광장, 소비적 장식품과 공공조형물에 대한 논의로
편입된다. 이 모든 것은 허위로서의 입체가 실제 공간에 침투, 교환, 경험될 때, 그리고 선행한 과정이 다시 역행할 때 분명해진다.
오은은 얼핏 단절된 것으로 여겨지는 한국 구상조각과 그것의 기념비성을 현재의 맥락에서
다시 헤아려본다. 그는 구상조각을 전승이나 역사화의 차원으로 접근하지 않고, 자기 주변의 상황을 압축적으로 결합시킨 연출 방식에 주목하며 주어진 상황, 재난, 부상을 극복하고 갱신하는 시도 자체를 기념한다. 이 같은 맥락에서, 작가는 손흥민과 부상당한 신체의 형상을 현재의 한계를 이겨내는 몸짓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늘 그래왔듯 한국 미술의 몇몇 장면을 겹쳐 놓는다. 일례로
〈마이너 인저리〉(2021)라는 작품의 타이틀은 박이소의 ‘마이너
인저리’를 호명해내고 타자성과 소수자성, 대안성에 대한 논의를
오늘의 상황에서 환기시킨다. 또 〈마이너 인저리〉와 〈라스트미닛골〉(2021)에서
확인되는 불구의 짓눌리고 종속된, 또 파편화된 신체는 1980년대 (신)형상 조각, 특히
류인의 작업을 떠올리게 한다. 줄곧 이전 미술을 참조해 온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한국미술의 현재를, 아직 정리되지 않은 미술의 성취를, ‘극장골’ 같은 개인의 약진을 그려본다.
최태훈은 기성품과 조각의 기능, 위상을
뒤섞으며 그것에 함의된 사회 역사적 맥락을 문제 삼거나 무효화하는 조각을 만들어왔다. 2018년부터
진행된 세 번의 개인전을 통해 DIY 제품의 기본 유닛들을 자의적으로 재구성하는 일종의 해킹 조각을
선보였고, 최근 윤민화 기획자와의 2인전 《트랙터》(2020)에서는 규격화된 사물과 신체(마네킹) 간 발현되는 긴장과 에너지를 상연하는 조각을 연출했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앞서 언급한 2인전과 2020년 개인전 《자소상》의
상이한 조형 방식을 하나의 작업으로 소환해낸다. DIY 가구 유닛들이 새로운 방식에 따라 수직 수평으로
연결되며 나름의 형태를 갖는 과정에 규격화된 사물에 긴장을 부여하는 신체와 스프레이 채색이 뒤섞이는 것이다. 대리석과
흙으로부터 생명을 끌어내던 조각은 마네킹으로 가뿐하게 대체되고, 전체 형태를 받치거나 연결하는 기성
오브제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오브제-마네킹의 다이내믹한
포즈는 영원불멸의 신체와는 거리가 먼 동시대 물질과 문화, 행위의 모방을 재확인시킨다.
《인저리 타임》은 일견 분리된 것으로 여겨지는 두 세계를 교차시키며, 과거와 연동하고 또 이산하는 매체로 오늘의 조각을 바라본다. 전시에서
작품은 어제와 오늘, 평면과 입체, 기억과 경험, 복제와 창작을 겹쳐 놓기도, 이 모든 것을 허술한 실존의 기념비처럼
제시하기도 한다. 공적이고 역사적이라기보다 언제든 복사와 붙여넣기, 크롭과
재구성이 가능한 사적이고 탈역사적인 조각은 스스로 상이함을 직조하며 다양한 조건과 심리가 혼재하는 상태를 만들어 낸다. 다섯 작가들이 시도하는 과거의 탐닉은 박제된 시간과 역사의 재연이 아니라 그것을 마주한 현재 자체를 체화하고
무대화한다. 과거의 사실을 종합하지도 기념비를 세우지도 않으며, 오늘에
편재하는 시차와 끊임없이 나타나는 갈등을 공개한다. 이들에게 과거는 이어달리기의 대상도 통제나 망각의
시공도 아닌 끊임없이 출현하는 어긋난 현재이다. 이번 전시에서 포착해야 할 부분 역시 이런 반작용과
운동성이 아닐까. 작업이 특정 대상, 시공으로부터 어떻게
어긋나고 있는지 그 위배의 움직임은 어디서 어떤 현재적 성좌를 구성하고 있는지 계속 발견해야 할 것이다. 전시가
말하는 추가시간은 시작도 끝도 없는 뫼비우스의 띠가 아니다. 그것은 어긋남을 생성해내는, 돌파의 구멍을 만들어내는 나선형의 시공이다.
기획/글 권혁규
[1] 위에 언급한 글은 『계간 시청각』 4호의
크리틱 섹션에 게재되었다. 권혁규, “인저리 타임”, 『계간 시청각』 (No. 4), 2020, pp. 8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