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용호, 〈Deer Head 12〉, 2010 © 지용호

예술은 이제 무엇을 생각하며, 그 길을 걸어가야 하는가? 지난 세기는 인간에게 있어서 역사상 유래를 찾아 볼 수 없었던 시련의 세기였다. 지난 세기는 [20세기 인간]이라는 독립된 용어로 인식하여야 설명이 가능한 특별한 시대의 인간을 탄생시켰다. 19세기까지 자연인으로 살아온 역사시대의 인간성을 ‘지워버린 인간’, ‘마음의 작동을 거부당한 인간’, 과속도로 움직이는 시간과 공간에 갇혀 교육받은 ‘과학적 인간’, ‘신호에 따라 움직이는 기호인간’ 등 모든 교육은 20세기의 사회가 요구하는 [사회적 인간]으로 규격화되어 꼼짝할 수 없이 볼트로 죈 인간(bolt-on-man)으로 생산된 인간(educational product)을 양산(mass product man)시켰다.

이는 분명 변종된 인간임에 틀림없다. 변종된 인간성은 더욱 변종된 인간성으로 변이되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고, 변종된 인간은 그 모든 환경을 변화시킨다. 변종되어버린 인간으로 생산된 인간이 교육시키는 현장에서 변종된 인간은 계속 생산된다. 변종된 인간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정신적 인간으로의 존재를 주장하면 할수록 변종된 인간들에 의해 소외된다. 결국 문명인을 거부하거나, 건전한 정신과 마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나, 문화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많은 값을 지불해야 한다.
 
지난 시대의 예술은 분명 지난 시대를 지배해 온 과학기술 혁명의 대열에서 동참하고 같은 길을 걸으며, 앞장서서 표현해 온 변종의 예술이었다. 아니면 새로운 운명을 개척해 온 인간들이 추구해 온 ‘새로움’의 노이로제에 걸린 예술, 그것도 아니라면 지난 세기의 예술가들이 추구해 온 예술에서 무엇을 건져 올려야 할 것인가? 2010 - 지난 세기가 끝이 났다는 것을 지시하는(index) 숫자 기호이다. 오늘은 어제와 다른 오늘이며, 21세기는 20세기와는 다른 세기이다.

우리가 버려야 떠날 수 있고, 내려놓아야 가벼워 질 수 있으며, 지워버려야 새로운 생각,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지난 세기 서구 현대미술의 문제점으로 지적된 물리학이나 사회과학이 안고 있는 문제와 함께한 지식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20세기 현대미술의 출발점이라고 할 ‘과학적 눈’으로 바라본 모든 것을 지워버려야 한다. 한마디로 자연과학적 영역으로부터 도입된 방법론적 전제도, 과학적 지식구조에 의해 학습된 지식으로 세계를 보고, 분석적으로 사물을 보는 눈도 씻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자연인의 눈’으로 돌아와 인간 중심의 출발로 새로운 세기를 볼 수 있을 것이며, 2010년 출발점에 서서 새로운 예술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삶의 경험을 통해 터득한 깨달음으로 세계를 보며, ‘자연인‘의 시각을 잃지 않으려고 투쟁해 온 역사를 품고 있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철저하게 인간 중심의 인식과 관심으로, 자연을 변종시키거나 변모시킨 인간화된 자연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온 ‘사이’를 존중해온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에게 사회적 담론 없이 문명은 ‘자연인’을 자연과학적 인간으로 변모시켜 삶을 송두리째 바꾸도록 강요했다.

21세기는 20세기에 대한 반동형성으로 예술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 걸어가야 할 인간의 길을 나서는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시작되는 시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앞 글은 두 젊은 미술가의 열정적 작업을 보고, 직접 만나 대화를 하면서 느낀 생각들을 좀 길다고 느낄 수 있지만 이들의 작업을 이해하고, 이들이 실험하는 모든 표현의 밑그림에 있는 생각들이 제3의 감상자들의 인식에 가려져 지나치거나, 이해의 거리로 인하여 닿을 수 없는 거리를 좁히려는 것이며, 이들의 생각에 동참하기 위해 작업을 감상하는 분들에게 대화하는 마음으로 글을 올린 것이다.

이제 세계는 우리 안에 있으며, 세계 안에 우리의 미술이 있다는 마음이 열려야 할 때이다. 작가는 물론 감상자들 모두 이해가 세계로 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지난 시대를 씻어내고 우리의 삶을 회복할 수 있으며, 회복된 시각으로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세계가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 속에 세계의 문제가 있고, 세계의 문제 속에 우리의 문제가 있으므로 우리가 추구하는 어떠한 주제나 표현도 세계로 통하는 언어여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두 작가의 전시는 [세계-나-표현]으로 인식하여야 한다.


지용호, 〈Buffalo Head 7〉, 2010 © 지용호

지용호의 작품은 인간에 대한 강력한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에게 대들고 있는 상징들은 단순히 짐승들의 멸종에 대한 경고가 아니라, 공존하며 함께 살아가야하는 인간 문명과 문화의 위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짐승보다 못한 인간들의 사냥은 결국 인간 스스로의 세계를 황폐화시키고 있다. 인간의 전쟁놀이는 문명의 발전된 도구들로 인간을 사냥하는 운명의 말기를 향해 브레이크 없이 달리고 있다. 

모든 짐승들을 먹어치우는 몬도가네의 세계에서 산적같이 쌓여있는 뼈들은 마치 폐 타이어들이 산처럼 쌓여있는 폐차장 같은 인간 운명을 보여주고 있다. 육식동물보다도, ‘초식인간’이 ‘육식인간’으로 변한 변종들에 의해 사라진 동물의 뼈들이 타이어의 질기고, 단단한 근육의 옷을 입고 작가의 손에서 살아나고 있는 강렬한 형상이 보는 이로 하여금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타이어는 인간의 다리근육의 확장이다. 예술은 인간의 내면에 숨겨져 있는 잔혹함이 교양과 그럴듯하게 위장된 외모로 인하여 가려진 형상을 폭로하고, 경고하는 예지적 기능을 수행한다. 가상현실의 세계에서 이러한 상징들이 살아 움직이는 장면을 상상한다면 과연 그들은 본래의 짐승으로 묘사될 것인가? 아니면 변종의 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인간과 싸워 이겨야 하는 새로운 종의 유전자를 소유한 뮤턴트(Mutant)로 인간을 먹어치우는 거대한 집단들로 묘사될 것인가?

후자는 인간의 밀집지역으로 달려와 인간을 멸종시켜 지구에 평화를 가져올 세계로 묘사될 것이다. 결국 인간이 그리는 모든 세계는 인간의 승리로 묘사 되겠지만 그의 작업을 통해 새로운 상징의 세계가 열리고 있음은 분명하다. 끝으로 그의 작업을 대하는 사람들에게 조언한다면 언어를 벗겨버린 묵상의 표현을, 언어를 상정하며 대하지 않는 것이 더 깊은 내용의 구조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두 개의 약한 다리로 달릴 수 없는 근육의 확장으로 가장 느린 인간에서 가장 빠른 인간으로 정복하는 힘이 되어준 타이어는 다리근육의 확장을 의미하는 상징이다. 그래서 타이어는 그의 작업에서 강력한 힘을 내포하는 근육으로 지각된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