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영준, 〈목요일엔 네 정결한 발을 사랑하리〉, 2023, 단채널 4K비디오, 컬러, 5.1 사운드, 18분 53초 ©탁영준

탁영준의 서울 첫 개인전 《목요일엔 네 정갈한 발을 사랑하리》는 이중성에 대한 탐구였다. 아뜰리에 에르메스 갤러리 공간에는 서로 직각을 이루는 두 벽에 단채널 영상 두 편이 투사되었고, 그 사이에는 전시의 시작과 끝을 동시에 담당하는 인접한 두 개의 조각 작품이 자리했다. 사물의 ‘쌍성(twoness)’이 이미 충분히 드러나 있는 듯 보이지만, 두 조각 중 하나인 My Big Expectation(2022)은 자체적으로도 딥틱(diptych) 형식으로 구상되었다. 라임우드, 밀랍, 금속, 오일, 고무로 구성된 이 두 개의 조각은 서로를 마주 보고 있으며, 흡사 과장된 흰 아스파라거스처럼 보인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둘 중 하나에만 성 요한 세례자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데, 살짝 벌어진 그의 입은 고통과 황홀 사이를 가로지르는 모호한 표정을 짓고 있다. 탁영준이 말하는 이중성은 동일한 사물의 반영이라기보다는 서로 다른 듯 보이나 놀랍게도 공통점을 공유하는 존재들의 병치를 의미하는 것 같다.

이러한 논리는 영상 작품 〈사랑스런 일요일 되길 바라〉(2021)와 〈 목요일엔 네 정결한 발을 사랑하리〉(2023)에서도 이항적 구조를 통해 강화된다. 전자는 베를린의 유명 게이 나이트클럽 슈부츠(SchwuZ)의 통로와 화장실 칸에서 움직이는 한 쌍의 댄서들과, 인근의 암 쥐트슈테른 교회(Kirche am Südstern)의 기둥과 계단을 어루만지는 또 다른 댄서 한 쌍을 교차 편집한다. 댄서들은 각 장소의 건축적 조건에 맞춰 안무를 조정하는데, 촬영 당일 탁영준이 공연 장소를 사전 통보 없이 바꿔버리는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다. 새로운 장소에 잘 맞지 않는 어색한 신체 움직임과 그 안에서 공간을 새롭게 인식해 나가는 팽팽한 대화들이 교차되며, 클럽과 교회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상반된 공간은 아닐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두 공간 모두 사랑과 퍼포먼스, 스펙터클의 장소이며—그 방식은 다르지만—바깥 세계로부터의 도피처를 찾는 사람들이 주말마다 찾는 곳이다.


탁영준, 〈목요일엔 네 정결한 발을 사랑하리〉, 2023, 단채널 4K비디오, 컬러, 5.1 사운드, 18분 53초 ©탁영준

이러한 평행 세계 간의 가로지름은 〈목요일엔 네 정갈한 발을 사랑하리〉에서도 계속된다. 이 영상에서는 스페인의 부활절 행진에서 근육질의 군인들이 예수의 조각상을 들고 나르는 장면과, 베를린의 유명한 크루징 장소인 그루네발트 숲에서 게이 댄서들이 케네스 맥밀런의 발레 〈마농〉(1974)에서 영감을 받은 장면을 연기하는 모습이 교차된다. 이 작업의 핵심은 성별화된 신체 표현을 퀴어링하는 것이다. 스페인 군인들의 과장된 남성성은 남성 신체의 가장 관능적인 부분을 클로즈업하는 호모에로틱한 시선으로 포착되고, 여성 주인공 마농이 땅에 발을 대지 않고 남성들에 의해 들어올려지는 장면은 게이 남성 무용수들의 퍼포먼스를 통해 재현된다. 탁영준에게 세계를 이항적으로 나누는 이분법은 경계가 흐려질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생산적인 것이다.

하지만 때때로 탁영준의 이항적 세계관은 다소 구시대적인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오늘날 LGBTQIA+ 정체성이 그 어느 때보다 널리 인정되고 있고, 퀴어 해방을 위한 급진적이고 전복적인 전략들이 이미 수많은 예술가들에 의해 제시된 지금, 교회를 퀴어 정체성과 대립되는 것으로 설정하는 것이 여전히 유효한지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탁영준의 작업을 그러한 계보 안에 위치시키는 것 자체가, 특정한 서구 중심, 혹은 북미 중심의 편향된 시각에서 비롯된 결과일 수 있다. 이러한 진전이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불과 1년 전만 해도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퀴어 퍼레이드가 서울시의 허가 거부로 무산된 바 있다. 이 장소는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 이러한 서울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탁영준의 작업을 구성하는 이분법적 구도는 더 이상 낡은 것이 아닐 수 있다. 긴박감 있고 정교하게 다듬어진 미학을 통해, 탁영준은 우리에게—퀴어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고—세계가 여전히 분열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