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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유사 다큐멘터리로 그려낸 극사실의 세계
2022.04.19
이수정 |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신정균,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 2021, 단채널 비디오, 3분 28초 ©신정균
1980년대, 할아버지 댁이
있던 시골 마을에는 ‘새몰아재’라는 사람이 있었다. ‘새몰’이란 한글도 한자도 아닌 단어는 알고 보니 ‘새마을’이었다. 귀가
어두웠던 노인들이 새마을 운동이라는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불렀던 이름이었다. 본래 자신의
이름이 있는데도 작은 시골 마을에서 새마을 운동과 관련된 활동에 앞장섰던 청년은 노인이 될 때까지 ‘새몰아재’라는 기묘한 이름으로 불리다 세상을 떠났다.
역사와
사회라는 거대 담론의 세월은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의 순간과 종종 대비된다. 사회가 여러 개인의 집합체이고
역사가 개인의 순간이 축적된 시간이지만, 우리는 ‘특별한
개인’과 ‘특별한 순간’만이
역사를 이룬다고 본다. 극소수의 인물을 제외한 우리 대부분은 역사가 기억하지 못하는 존재로 살아가지만, 역사적 사건은 평범한 사람에게 침투하고 흔적을 남긴다. 사회적 위협이나
불안에 대한 정보는 여러 가지 이유로 대다수 개인에게 여러 가지 이유로 늦게 전달되거나 접근이 제한된다. 그
결과 개인은 예상치 못한 위험에 노출되고 스스로 통제하지 못한 상황으로 인생이 변화하게 된다.
신정균은 거대서사와 개인의 삶이 교차하는 지점들에 주목하고 그 사건의 흔적을 역사가나 사회학자와는 다른 시각에서 기록하고 해석한다. 초기작〈보편적인 이야기〉(2010)는 징병제를 실시하는 국가인 대한민국의 남성으로서 작가가 군대에 관한 사적인 기억을 중심으로 한 작품이다. 부대로 복귀하는 버스 터미널부터 실제 근무했던 부대까지 이동 경로를 따라간다. 작가의 기억이지만 많은 관객의 기억과 경험과도 공명한다. 군대 생활은 빈부, 학력, 지역 등 여러 격차가 무너지는 경험으로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경험하는 사건이다.
〈스테가노그라피 튜토리얼〉(2019)은 전달하려는 기밀정보를 사진이나 음성 파일에 숨기는 심층 암호화 기법을 다룬다. 곳곳에 남아 있는 전쟁의 흔적이나 온라인 플랫폼상에서 벌어지는 ‘자본’을 둘러싼 치열한 각축전 등 우리 사회에는 실재한 전쟁의 흔적이 유령처럼 떠도는 한편, 온라인상에서는 주로 ‘돈’을 목적으로 한 개인 정보 유출, 거래, 공격 등이 실시간으로 발생한다. 북한의 위협, 전쟁 발발의 위협이 특정한 시기, 또 특정한 공간에서 강조되는 데 반해 우리를 위협하는 온라인상의 공격은 은폐되거나 간과된다. 신정균은 그 불균형의 상황을 감지하고 불안과 위험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신정균이
우리에게 불안과 위험을 공유하는 방식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그가 역전된 상황을 연출한다는 점이다. 예비군
훈련장에서 북한침략의 위험을 심드렁한 자세로 듣는 예비군이나 온라인 쇼핑이나 모바일게임을 하다 개인 정보를 약탈당하는 네티즌처럼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든다. 다크 투어리즘을 연상시키는 구 안기부 관련 장소를 관광가이드가 소개하는 〈석관투어〉(2018), 엑소(EXO)의 케이팝 〈으르렁〉 가사를 선동 문구처럼
붉게 쓴〈옥류체로 쓰여진 노래〉(2013), 북한에서 만들어진 선전가요를 노래방 화면 형식으로 만든
〈베고니아 부르기〉(2016) 등 일련의 작품에서 의도적으로 서로 어울리지 않을 요소를 조합했다.

신정균, 〈발끝으로 걷는 사람〉, 2021, 단채널 비디오, 9분 24초 ©신정균
코로나라는
재난 이후, 갑작스러운 재난과 위기에 대한 불안이 2021년의
우리 곁에 감돌고 있다. 각종 재난 상황이 우리에게도 갑자기 닥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느끼지만 어떻게
이 불안을 불식시킬 수 있을지는 아무도 대답할 수 없다. 신정균은 우리 사회뿐 아니라 전 지구에 도래한
재난의 시대 앞에 선 개인에 주목했다. 세월호가 멈췄을 때 배 안에서 살아나온 사람은 안내 방송을 따라
선체 내에 머물렀던 사람들이 아니라 스스로 상황을 판단하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던 사람들이다. 재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우리를 구해줄 시스템이나 영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식 속에서 본능적으로 자신을 지킬 수 있을 감각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젊은
모색 2021》에서 신정균은 바로 이 지점에 주목했다. 〈발끝으로
걷는 사람〉(2021)은 사용하지 않는 취수장에서 곡예사의 퍼포먼스를 담았다. 영상 속인물은 호이스트에 매달린 줄을 타고 올라가거나 뻑뻑해서 잘 돌아가지 않는 톱니를 힘들게 돌린다. 사실 취수장 자체는 재난의 공간도 역사적 공간도 아닌 주변의 흔한 시설일 뿐이다. 오래 사용했지만 이제는 더 사용하지 않은 채 멈춰 있는 공간, 우리는
이와 유사한 공간을 수없이 찾아볼 수 있다. 원래 위험했던 공간도 재난이 발생할 공간도 아니기에 재난과
무슨 상관일까 싶은 공간이지만 영상 속에서 공간은 기묘하고 낯설다. 밧줄 하나에 몸을 의지한 채로 움직이는
곡예사의 몸짓 또한 우리가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 평범한 공간의 느낌이 완벽하게 탈각되었고 취수장은 특별한 배경과 서사가 있을 법한 공간으로 무의미한 행위를
반복하는 퍼포머는 특별한 비밀의식이라도 취하는 듯 진지하다. 위기의 상황에서 영화 속 히어로처럼 줄
하나로 탈출할 수 있는 능력쯤은 키워둬야 우리는 가까스로 스스로를 구해낼 수 있을까. 물이 계단을 넘쳐흐르는
상황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재난으로부터의 대피가 스스로를 구조하는 일이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퍼포머의 숨소리와 기계 소리만 들리는 영상은 고요하지만 그 침묵은 낮고 무겁게 관객을 감싼다.
전시실
도입부에 설치된 〈셸터〉(2021)는 취수장을 둘러싼 사람들의 인터뷰를 소개한다. 취수장을 관리하는 기관의 담당자는 무미건조하게 그곳의 역사를 소개하는 데 비해, 주위를 자주 산책한다는 주민은 취수장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다소 과장된 어조로 이야기한다. 수맥이 흐른다며 수맥봉을 보여주는 인터뷰이까지 더해져 다큐멘터리나 시사 프로그램의 뉘앙스를 차용한 이 자못
진지한 영상이 무엇을 다룬 것인지 혼란스러워진다. 진실을 폭로하고 중요성을 부과하는 다큐멘터리의 어법을
충실하게 사용하지만 이 영상은 오히려 취수장에 대한 정교하게 만든 거짓말, 혹은 빈 이야기이다. 무엇을 보아야 하고 무엇을 보지 말아야 할지 시선을 뺏긴 사이 우리가 놓친 것은 무엇인지, 신정균의 작품은 현실 속에서 우리가 처한 상황을 극사실적으로 재현한다. 빈
다큐멘터리와 진지한 거짓말, 버려진 진실 등 신정균은 사실과 허구, 즉
중요한 역사적 장소와 무의미한 공간 사이에 관객을 세운다. 그리고 역사와 사회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사실적인 개념으로 어떻게 존재하는지 사실과 허구 사이를 우리가 구분하고 경험할 수 있는지 들여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