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우주를
수건(繡巾) 삼아
광복 후 자수는 ‘민족 정체성의 회복’, ‘왜색 탈피’, ‘현대화’, ‘전통의
현대적 계승’등 문화예술계 전체의 기치에 동참했다. 자수는
한편으로는 ‘추상화’,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의 부활’이라는 형태로 전개되었는데, 전자는 주로 아카데미 안에서 후자는 그 밖에서 이루어졌다. 3전시실에서는
아카데미 안팎에서 진행된 소위 창작공예=현대공예로서 자수를 소개한다.
이 시기 자수 분야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건은 1945년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내 자수과가
설치된 것으로, 1980년 자수과가 섬유예술과로 통합되기까지의 과정은 변화하는 자수의 위상을 반영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추상미술은 가장 진보적이고 현대적인
시각언어로서 세계적인 동시대성을 획득했다. 자수도 추상이라는 새로운 조형언어를 적극 수용, 1950년대 중반 자수 분야에서도 반(半)추상 형식이 등장했고, 1960년대 이후 대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추상으로까지
나아갔다. 대학에서 자수를 전공한 이들은 물론 대학에서 정규교육을 받지 않는 자수 작가들도 비단 외
다양한 재질의 바탕천과 실, 그리고 의외의 재료를 사용하며 전통적인 기법에 얽매이지 않고 추상을 실험했다. 이들의 시도는 계속되었지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자수는 재료와 시간을 낭비하는, 현대화해야 하는 극복의 대상으로
인식되는 가운데 점차 퇴조의 길을 걷게 되었다.
4. 전통미(傳統美)의 현대화
아카데미에서 자수의 위상이 줄어든 것과 달리 아카데미 밖에서 자수는 조국근대화, 산업화 시대에 국가 경제에 이바지하는 산업공예로, 그리고 보존·계승해야 할 전통공예로 부각되었다. 이때 주목받은 자수는 ‘동양자수’였다. 동양자수는
수출용, 혼수 및 예단용, 기념품용, 실내장식용 등 국내외로 인기가 높았고,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솜씨
좋은 여성들이 수방(繡房)에 모여 분업 형식으로 수요에 맞추어
각종 자수품을 제작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일제강점에 의해 맥이 끊기다시피 한 조선시대 자수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이 수집과 연구, 전시로 이어지며, 전통자수와 근대 일본풍 자수가 혼합된 절충적인
자수가 동양자수라 불리던 상황은 점차 변화하기 시작한다. 박영숙ᄋ허동화
부부가 1960년대부터 수집해 온 유물을 토대로 1970년대
후반 한국자수박물관을 세웠고, 조선시대 자수를 체계적으로 연구한 서적이 발간되기 시작했으며, 1984년 국가무형문화재 자수장이 지정되었다. 전통자수의 계승과
현대화는 열정과 신념을 지닌 이들에 의해 지속되고 있으며, 동시대인들로 하여금 수공(手工)과 공예의 가치를 재고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바늘을
도구 삼아 다채로운 색실로 직물을 장식하는 자수는 인류의 오랜 문화유산 중 하나다. 이천 년 역사를
지닌 한국자수는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교류 속에서 시대마다 독특하고 아름다운 문화를 꽃피웠다. 그런데
훼손되기 쉬운 재료 특성상 현전하는 고대, 중세 유물은 지극히 적고,
‘전통자수’라 불리는 유물 대부분은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제작되었다. ‘자수’하면 떠오르는 것은 이러한 전통자수, 특히 조선시대 여성들이 제작하고
향유한 규방공예 또는 이를 전승한 전통공예로서의 자수로, 근대기 이후에는 마치 자수가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근현대 자수는 낯설다. 19세기 이후 자수의 역사,
즉 개항, 근대화=서구화, 식민, 전쟁, 분단, 산업화, 세계화 등 격변의 시기를 거치면서 변화한 자수의 흐름은
주류 미술사의 관심 밖에 놓여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번
전시는 알려지지 않은 자수 작가와 작품을 발굴, 소개하고 미술사에서 주변화되었던 자수 실천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살펴본다. 관람객은 섬세하고 아름답게 수놓은 듯한 자수의 역사 뒷면에 순수미술과
공예, 회화와 자수, 남성과 여성, 창조와 모방, 전통과 근대, 서양과
동양, 공(公)과
사(私), 구상과 추상, 수공예와
산업(기계)공예, 아마추어리즘과
프로페셔널리즘 등 여러 층의 실들이 엉켜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자수의 재료인 바늘과 실은 마치
세상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이러한 이분법적 경계에 의문을 던지듯, 바탕천의 표면을 뚫고 뒷면을 접촉하곤
다시 표면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한국 근현대 자수의 계보와 불연속성을 고찰하는 이번 전시가 자수라는 ‘바깥의 사유’를 통해 순수미술 중심으로 서술되는 한국 근현대미술사의
지평을 확장하는 데 보탬이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