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영상문화 도래와 한국 싱글채널 비디오의 태동Ⅰ
영상 매체 작업의 변환은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중반에 걸쳐 이뤄졌다. 이 시기를 지나면서 영상작업은 앞선 세대의 오브제화와
결별을 시도했다. 바로 영상이라는 매체 본연의 미학과 기술적 특성을 추구한 것이다. 이 시기 영상작업의 특성은 비선형적 서사, 파편적 편집, 시간적 변형, 사운드와 이미지의 충돌, 이미지와 텍스트의 불일치 등 비디오의 장치적 속성을 활용한 점을 들 수 있겠다. [월간미술]은 이번 호부터 4회에
걸쳐 이 시기 영상작업, 특히 싱글채널 영상작업에 대한 필자의 논단을 싣는다. 먼저 김세진의 작업으로 출발한다. 1990년대 말 영화와 뮤직비디오 신(scene)에 연관되어 상업적
감각을 띤 그의 초기작을 파헤친다. 필자는 이번 연재의 의의를 “한국
비디오아트의 지형도를 그리기 위한 첫걸음”이라 밝히고 있다. 이와
더불어 ‘현장성’을 바탕으로 해야 풀어낼 수 있는 영상작업에
대한 비평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필자는 그 과정을 통해 현재 영상 환경을 파악할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김세진 _ 1990년 후반 영상산업과 비디오
작가들의 관계
0.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의 미술 잡지 목차를 살펴보다 보면 눈에 띄는 경향이 하나 있다. 유독 멀티미디어나 비디오아트에 대한 특집이 집중돼 있다는 점이다. [월간미술]로 한정하더라도 이러한 경향은 명확하다. 일례로 1998년도 7월호는 특집으로 ‘영상시대의 이미지 읽기’에 대한 주요
전문가 3인의 논고를 싣고 있고, 같은 해 10월호와 11월호는 전시초점이라는 표제 아래 《98 도시와 영상: 의식주전》(1998)을
위시한 당시의 주요 비디오 전시들에 대한 심층 리뷰를 다루고 있다.1) 이러한
경향은 2000년대 초반까지 지속되어 2000년 3월호에는 싱글채널 비디오에 대한 두 편의 학술 에세이가, 같은 해 6월호에는 당시 주요 미디어아트 전시에 대한 집중 리뷰가, 9월호에는 MTV 2)시대의 새로운 감성에 대한 대대적인 특집 기사가 수록된다.3) 전시 현장 또한 예외가 아니었던 모양으로, 심상용은 2000년 7월한 월간지에 실린 전시 리뷰 중 젊은 작가의 전시 7개 중 5개가 프로젝션과 영상이미지, 비디오 설치임을 지적한다.4)
이 같은 현상의 배경에는 복합적인 이유가 자리한다. 근본적으로는 1995년 케이블 방송의 개국과 함께 만개한 영상문화의 강력한 자장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1995년 2월 최초의 음악 전문 방송인 M.net이 개국한 이래, 동아
TV, KMTV, 투니버스, YTN 등이 잇달아 개국하면서 바야흐로 케이블TV 시대가 열린다. 1996년
M.net과 DCN, 캐치원, 매일경제 TV 등이 24시간 방송을 시작하며 영상시대의 개막은 본격화된다.5) 특히 M.net은 개국 당시부터 MTV 프로그램을 편성하고, 1998년 MTV 아시아와의 전략적 제휴, 1999년 국내 최초 24시간 실시간 인터넷 방송 등을 실시하며 젊은 세대의 이미지 감각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감각적, 유희적, 표피적, 즉흥적 같은 수사로 표현되는 이미지 중심의 감성은 기존의 국내 비디오 작업과는 다른 감각으로, 이는 김세진을 비롯해 1990년대 후반 대중문화적 감각을 탑재한
새로운 작업들로 이어진다.
한편, 미술계 내부 변화도 이러한 변화가 가시화되는 데 일조한다. 우선, 《국제 비디오아트전-천년의 미소를 넘어서》(경주
세계문화엑스포, 1998), 《98 도시와 영상:의식주》(이영철 기획, 서울600년 기념관, 1998), 《미디어시티 서울 2000》(http://mediacityseoul.kr/2016/ko/about/mediacity-seoul)(총감독
송미숙, 경희궁 근린공원 외 지하철 13개 역사, 전광판 42개, 2000) 등
굵직한 대형 영상 전시들이 이 시기에 개최된다.6) 특히 미술작가 외 그래픽
디자이너, 건축가, 영화제작자, 사진가 등을 대거 포함시키고, 거친 전시장을 역동적으로 분할하는
과감한 공간 연출로 작품과 작품, 미술과 비미술, 작품과
공간 간의 ‘비선형적 시각 커뮤니케이션’을 창출한 《98 도시와 영상:
의식주전》은 밀레니엄 시대를 앞둔 도시의 감각을 잘 포착한 전시로 향후 영상 작가 및 관련 전시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미술관 외에 지하철 역사와 서울 시내 곳곳의 전광판을 미디어 파사드로 활용한 《미디어시티 서울 2000》 역시 일상화된 미디어의 감각을 체현하는 데 기여했다. 영상
및 뉴미디어를 전문으로 하는 기관이 생기기 시작한 시점도 정확히 이때다. 2000년 국내 최초의 미디어아트
전용 공간을 표방한 일주아트하우스가 문을 열었고, 같은
해 SK 사옥에 아트센터 나비가 재개관하며 영상
및 뉴미디어 작업 붐에 일조한다. 특히 전시장과 미디어 아카이브, 디지털
편집실, 학술 세미나 및 콘퍼런스 공간을 모두 보유하고 있던 일주아트하우스는 2005년 폐관하기까지 비디오아트를 비롯해 실험영화 및 다큐멘터리 영역의 영상 작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 글은 국내 영상작업에 질적 변화가 발생한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중반 사이 비디오아트 신의 전모를 파악하고 싶은 마음에서 출발했다. 장치 자체에 대한 탐색이나 오브제 성격이 강하던 앞 세대와 달리 이 시기의 비디오 작업은 이미지 중심의 영상작업
본연의 미학을 처음으로 추구한다. 비선형적 서사, 파편적
편집, 시간적 변형, 사운드와 이미지의 충돌, 이미지와 텍스트의 불일치 등 오늘날 익숙한 영상작업의 문법은 이 시기에 본격화된다. 시선 / 주체의 분열이나 다층적 서사, 혼성적 신체, 시공간의 교차 같은 개념도 파편적인 비디오의 구조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가로 김태은, 박혜성, 김세진, 박화영, 유비호, 노재운, 홍성민, 김두진, 이윰, 한계륜, 서현석, 장지아, 함양아, 함경아 등을 꼽을 수 있다. 국내
영상문화의 수혜를 몸으로 흡수하거나 유학을 통해 서구권에서 비디오아트를 익힌 이들은 이미지 감각을 체화한 최초의 영상 세대로 강의나 작업을 통해
후속 세대를 양성함으로써 동시대 영상작업의 직접적 선례가 된다.7)
1. 한국
비디오아트사에서 1990년대 말-2000년대 초중반의 의미는
‘싱글채널 비디오’의 태동으로 요약될 수 있다. 국내 비디오아트의 역사는 멀게는 김구림, 박현기가 활동한 1970년대부터 시작되고, 가깝게는
1980년대 말 등장한 이원곤, 오경화, 김재권, 조태병, 육근병을
거쳐 1990년대 초중반 김영진, 김창겸, 김해민, 육태진, 심철웅에
들어 본격화된다고 볼 수 있다.8) 하지만 199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싱글채널 비디오는 활성화되지 못했는데, 여기에는
한국적 맥락이 자리한다. 1980년대 말-1990년대 중반의
한국 비디오아트는 감성 면에서 관념적이고 실존적이었고, 매체적으로는 비디오 설치가 다수였다. 김영진의 영상설치는 그 좋은 예다. 로마시대의 투구나 인도의 불상, 진시황제릉에서 출토된 토우의 두상에 자화상을 투사한 〈위험한 실험〉(1991)이나
마오쩌둥과 레닌, 다윈의 원숭이가 역사적 증거물로 등장하는 〈이성의 시대〉(1992)에서 영상은 역사적 유물과 만나 시공간적 교차를 만들어내는 정적인 장치에 가깝다.9) 간혹 움직임이 있는 경우에도 편집에 의한 영상 자체의 운동보다 장치의 움직임이
더 큰비중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슬라이드 프로젝션의 초점을 기계적으로 조작해 두개골 위에 투사된
자화상 이미지가 흐려졌다 선명해지기를 반복하며 숨을 쉬는 효과를 준 〈아름다운 사건〉(1991)이나, 펌프와 순환장치를 결합해 아크릴 판 위에 떨어지는 물방울을 실시간으로 투사하는 〈액체〉(2002)가 대표적인 예다. 고가구나 오브제를 이용해 복합적인 영상설치를
한 육태진의 경우도 이러한 경향은 명확하다. 계단처럼 만든 선반 위에 계단을 올라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촬영한 영상들을 배치하고 모터를 이용해 움직이게 해 이미지와 오브제의 행위가 일치하도록 한 〈춤추는 계단〉(1994)이나, 대형 터널 안에 투사된 사람의 이미지가 기차소리의 고저에 따라 커졌다 사라짐을 반복하는 〈터널〉(1998)에서 영상과 설치의 비중은 동일하다. 이러한 경향은 일차적으로
긴 영상의 편집이 1990년대 후반만큼 기술적으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 개념적이고 조형적인 측면에서는 당시 작가들이 오브제와 설치미술이 부상했던 1980년대 후반 한국미술계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10) 단색조
미술에 대한 반대급부로 등장한 타라, 난지도, 메타복스, 로고스와 파토스 등의 소그룹들은 탈모더니즘을 주창하며 1980년대 말 탈평면 조류를 견인한다. 물론 1990년대 초중반 미디어 작가들은 소그룹 운동 세대보다 후학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직간접적으로 설치가 대세이던 당시 시각언어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역사와 개인, 생성과
소멸, 나와 타자, 순환과 재생 같은 비디오 작업의 주제는
신화, 부재, 초월, 허무
등이 제목으로 자주 등장하는 1980년대 설치미술의 정서적 풍토와 맥이 닿아 있다.
결국, 비디오 조각이나 비디오 설치가 아니라 영상만으로 승부하는 싱글채널 비디오는 1990년대 말이 되어서야 등장한다. 서구 비디오아트의 경우 1970년대 등장 당시부터 싱글 채널이 중심이었음을 생각하면 이러한 상황은 특수하다. 장치나 오브제의 비중이 높던 초기 한국 비디오아트가 내용 중심으로 이행하는 데는 영상문화의 보편화와 외부의
자극이 필요했다. 조선령의 지적처럼, 한국 싱글채널 비디오는 TV로 대표되는 대중적 영상문화의 영향력이 한국 사회에 각인된 1990년대
말 이후에야 진정한 의미에서 수용되고 창작될 수 있었다.11) 그런데 비디오아트가
상업적 TV 문화 범람에 대한 대항의 맥락에서 발생한 미국 상황과 달리, 한국의 싱글채널비디오는 오히려 상업광고 및 대중문화의 내부에서 탄생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서구권에서 교육받은 작가들의 경우를 제외하고, 국내에서 자생적으로
발원한 영상 중심의 작업들은 산업으로서의 광고와 영화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대중문화적 감수성을
기반으로 한 1990년대 신예작가들을 소개하는 한 기사는 CF 감독
박명천, 만화가 모해규와 신일섭, 애니메이션 감독 이성강, 전승일을 미술가들과 함께 거론하며12), 영상시대 작가들의 감성을 소개한 또 다른 특집은 사진(이상학), 패션(김성복), 만화(이명석), 영화(김봉석), 대중음악(강헌) 분야의
평론가들을 대거 초대해 넘쳐나는 시각문화의 속도, 기호, 정서를
미술 내부의 변화와 접목시키기를 시도한다.13) 김세진은 이러한 조류를
제일선에서 수용한 대표적인 작가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비디오아트의 루키로 일찍 주목받은 그의 작업은
미술계가 아니라 CF와 영화 등 대중문화 현장에서 출발했고, 그런
까닭에 당시 상업 신의 감각을 가장 첨예하게 표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