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백은 90년대 초반부터 현재까지 싱글채널 비디오에서부터 상호작용, 음향예술, 키네틱예술, 심지어
로보틱스 기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테크놀로지를 실험해 왔고, 특히 한국에서는 이 방면의 가장 대표적인
작가로서 그 위상을 인정받아 왔다. 그러나 그의 작업에 대한 높은 평가는 그러한 기술적 실험 자체보다는, 이러한 테크놀로지적 형식 속에 전자매체시대의 특유한 문화적 쟁점과 상상력을 표현해 내는 그 만의 능력에서 오는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90년도 초반 이후 현재까지의 이용백의
작업 중 중요한 사례 몇 가지를 발췌하여 논할 것이며, 이를 통해
"시뮬레이션 시대에 있어 현실과 가상의 관계", "탈중심화된
정체성", "디지털매체가 수반하는 이종적이고 전복적인 힘"과 같은 그의 관심사와 시각적 어법이 드러날 것이다.
우선 ‘엔젤-솔저’ 시리즈의 경우를 보면, 이 작품들은 비디오 영사, 사진, 오브제 설치 등 다양한 매체들로 제작되는 시리즈로서, 그들은 다른 사물은 일체 없이 오직 화려한 인조 꽃들로만 채워져 있는 인공적 공간을 보여주며, 이는 오직 시뮬라크르들로만 순수하게 구성된 디지털 시뮬레이션의 세계를 환기한다. 예를 들어 비디오 작업의 경우에는 그러한 인공적 공간 속에서 꽃 무늬로 완벽히 위장하고 총을 든 채 살금살금
전진하는 군인의 동작을 발견하고 놀라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 시뮬레이션 공간은 주체의 필사적
생존이 걸려 있는 극한적 전쟁터와 같은 것으로 묘사된다.
여기서 그 인조 꽃들은 일종의 강한 유혹의
힘을 행사하는 시뮬라크르이며, 군인은 그 환경과 완전히 분리된 독립적 개체가 아닌, 그 시뮬레이션 환경의 일부로서만 존재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한편으로는 인간의 존재론적 측면에서는 "외부(전자적 환경)와 내부(주체) 사이에 상호교환", "사이버공간 속에서 재구성되는
'액체적 자아' 혹은 주체의 소멸" 등과 같은 문제를 환기시키는 것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은
컴퓨터 시뮬레이션의 세계와 몸에 기반한 현실세계의 경계를 오가며 전쟁을 수행하는 오늘날의 디지털전쟁과 사이버산업의 스산한 풍경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시리즈에 속하는 또 다른 작업으로서 군복을 활용한 오브제 설치는 디지털매체시대의 예술가와 창조의 개념에 대해 위트있는 발언을
하고 있다. 이는 비디오 작업에서 활용된 바 있는 꽃무늬 위장군복과 헬멧 등의 실물을 나열한 설치인데, 각각의 군복에는 높은 계급인 장성 계급장과 함께,
"Windows", "Quicktime", "Word",
"Explorer" 등의 로고들이, 그리고 명찰에는 보이스, 피카소, 뒤샹, 백남준, 다빈치 등 미술사의 중요한 대가들의 이름이 기입되어 있다. 이 작품은
인조 꽃무늬, 전투복, 디지털 문화의 주요한 상징, 예술적 창조의 상징 등 4가지 요소들을 교차시키는 방법을 통해 시뮬레이션
시대에 새롭게 변모한 예술적 창조의 개념을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오늘날의 예술이 가상공간 속에서의
무수한 복제와 편집, 변형의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매우 가변적이고 전략적인 산물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암시이다. 예술의 진정한 생존과 위상 자체가 모호해지고, 예술가는 '기원적 창조'가 아닌 '복제물의
차용과 재구성'이라는 시뮬레이션 형식을 빌어서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역설적 존재, '창조-이후'의 존재로
나타난다.
이어서 다른 작업인 〈새폴더-견인하기〉(2007)에서는 오늘날 보편화된 쟁점인 바, 가상과 실제 간의 이분법적
대립의 와해를 매우 유머러스하게 보여준다. 이 작업은 컴퓨터에서 가상적으로 생성되는 '폴더' 아이콘을 3미터
길이로 확대 제작한 것으로서, 바로 그 옆에는 이 '실제의
물질적 폴더'를 여러 명의 어린이들이 힘겹게 끌고 가는 동영상이 영사된다. 본래 물질적 중량이 전혀 없는 가상적 이미지에 불과한 폴더 아이콘은 여기서 매우 역설적으로, 현실의 중력과 나아가 신체적 노동에 접속된 존재로서 전복적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소위 사이버시대에 살고 있지만, 이 사이버 공간이란 것은 닫혀져 있는 공간이 아니라 실제의 물질세계에
밀접하게 접속되어 있는 세계이다. 우리는 클릭 몇 번으로 자연스럽게 사이버공간에서 쇼핑을 하고, 나아가 전쟁이라는 엄청난 행위를 수행하기도 한다. 우리는 사이버공간에서
마치 게임인 것처럼 세계를 조작하고, 또 바로 이러한 과정으로 인해 세계로부터 유리된다. 는 바로 가상공간과 현실공간 간에 발생하는 상호작용과 상호변형의 측면을 재치 있게 그려낸다.
작품 〈거울〉(2007)과 〈슬픈
거울〉(2007)도 넓은 맥락에서는 실제와 가상의 대립의 와해라는 맥락 속에서 이해될 수 있는 작품들이다. 이 작품은 커다란 거울 뒤에 LCD모니터를 배치하고 이 화면을 통해
거울이 깨지거나 커다란 물방울이 맺혀져 흐르는 영상을 나타나는 단순한 구조로 되어있지만, 그것이 실제로 주는 충격은 대단하다. 왜냐하면 그 거울은 뒷면에
설치된 모니터 화면과 프레임을 안보이게 감추면서 영상만을 투과시키는 기능을 하고, 그 결과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마치 거울 그 자체가 깨지거나 거울 위에 실제 물방울이 있는 듯한 환영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모니터나 프로젝터를 통해 보는 화면과는 느낌이 매우 다르다. 이용백의 이 작업은 거울이라는 실제
사물이 지닌 물질적 느낌과 가상적 영상을 완전히 하나로 융합시키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실제와 가상
사이, 혹은 의식과 꿈 사이의 모호한 경계에 멈추어 있는 듯한 느낌을 창출한다. 이러한 실제와 가상 간의 경계에 대한 탐구는 이전의 다른 작업들에서도 지속적으로 나타나 온 바 있다. 예를 들어 작품 〈Window
in window〉(2005)가 그 예로서, 여기서는
창문의 형태를 갖춘 화면 속에서 아이들이 마치 실제 세계와 교통하는 듯 관객 쪽을 바라보며 노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중간 중간에 마치 기술적 결함처럼 나타나는 청색 화면과 컴퓨터 명령어들은 아이들의 모습이 단지 데이터로 작성된
가상적 이미지임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이 아이들 앞에는 '시체'의 영상을 담은 LCD모니터가 반복적인 왕복운동을 하고 있으며, 아이들은 그것을 보고 "죽었다, 죽었다"라고 외친다. 여기서
우선 중시할 점은 관객에 의해 바라 보여지는 가상적 영역과 이를 바라보는 관객주체의 입장이 전도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아이들의 영상은 극장의 스크린처럼 관객의 시선이 한 방향으로만 집중되는 대상이 아니라, 영상 자체가 창문의 구조를 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가상공간의 아이들이 거꾸로 관객의 바라보는 전도된 상황을
연출한다는 점이다. 그럼으로써 그것은 아이들을 바라봄으로써 역으로 아이들에 의해 바라보여지는 바 일종의 '시선의 상호교차배어법적(chiasmatic) 중첩'이라고 부를 만한 상황을 연출한다.
실제와 가상의 문제 이외에도 이용백의 작업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쟁점은, 상징적
질서에 대한 위반, 혼성성 그리고 탈중심화된 주체의 문제이다. 〈비정상〉(2002)이란 작품은 몰핑의 기법을 통해 디지털예술의 가장 중요한 면모인 '액체성'과 '가역성'(可逆性), '변형성'을 부각시킨 작품이다.
그 작품은 부처의 도상이 예수의 도상으로, 다시 예수가 부처로 끊임없이 변형되어 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것은 괴기스러운 변신의 몸부림과 효과음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모든 변형과정은 사실 그 도상들이 지니는 상징적 궤도로부터 일탈을 시도하는 불경스런 의도로 가득 차 있으며, 나아가 그러한 불경스런 변신을 죽음의 충동과 자해의 쾌락, 무아적
황홀경의 상황으로 보여주고 있다.
상징적, 문화적 경계를
위반하는 이러한 거역적 운동은 사실 몰핑과 합성기술이 지배하는 인터넷 사이버공간의 가장 중요한 문화적 특성이고 생태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이든지 차용, 합성되어 제3의
변종으로 '전락'하는 과정 말이다. 사이버공간에서 순수함과 지역적 경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시각적
기호는 변형을 겪게 되고, 고착된 상징적 질서로부터 분리되며, 이
작품은 바로 그러한 디지털 문화의 문화생태적 특성을 암시한다. 이러한 특성은 달리 표현하면 '이질적 세계들의 혼성적 공존'과 같은 것이며, 이는 철학자 장-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cois
Lyotard)가 이미 80년대 포스트모던 문화의 중요한 특징으로 제시한 '이교성'(異敎性,paganism)의
개념과 밀접히 연관된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조르유 바타이유(Georges
Bataille)는 초현실주의 미술 속에서, "타자의 침범과 공격에 의해 자기적
동일성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 "하나의 단일한 형태로 정의될 수 없음", "잡다성에 의해 세계가 무너지는 순간"들을
발견해 내고 이를 '이종성'(heterology)과 '비정형'의 개념에 연관시킨 바 있는데, 이 역시 이용백의 작업의 특성을 잘 드러내주는 표현이라 생각된다. 더욱
비약하자면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이용백의 작품뿐만 아니라 디지털 예술의 많은 부분들은 라울 위박(Raoul
Ubak)이나 자끄-앙드레 부아파르(Jacque-Andre
Boiffard), 만 레이(Man Ray) 등의 초현실주의 사진들과 공통점을 갖는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최근에는 이러한 디지털 영상에서 보이는 기호의 변형과 붕괴, '액체적' 미학에 대해, 매체철학자
알랭 르노(Alain Renault)는 '닻에서 떨어져 나간
기호'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것은 이제 첨단 시뮬레이션
시대의 이미지들이 그 어떤 고착된 의미론적 상징적 기능들로부터 분리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심사는 그의 신작 〈피에타〉에서도 잘 나타난다. 〈피에타〉에서는 전통적인
성모마리아와 예수의 모습이 사이보그 혹은 로보트로 대체되어 있다. 이것은 마치 이제 디지털 시대에는
휴머니즘적 의미의 인간과 신이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를 온갖 불경스러운 혼성적 사이보그나 로보트, 그리고
생명공학적 괴물들이 차지하리라는 다나 해러웨이(Donna Haraway)의 통찰을 환기시키는 듯하다. 이 〈피에타〉에서 사용된 기계적 구성, 즉 반반사 유리로 덮힌 상자와
그 안에 숨겨진 채 왕복운동하는 모니터로 구성되는 방식은 과거의 다른 작품들을 통해서도 다양하게 응용된 바 있다.
예를 들어 〈모니터 속의 쌍둥이들〉(2001)라는
작품을 들 수 있으며 이 작품은 '비정상', '돌연변이', '분열된 주체'의 상황을 마치 마술적 환각을 보는 듯한 입체영상으로
보여주는 작업이다. 그 영상은 마치 태반 속에서 꺼낸 듯한 몸이 붙은 돌연변이 쌍둥이의 모습으로서, 이것은 실은 반투과 유리 밑에 감추어진 채 작은 레일 위에서 전후 왕복운동을 하는 모니터로부터 나오는 영상이며, 이로부터 마치 환각을 보는 듯한 입체 영상이 연출된다. 가두어진
암흑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부유하는 이 쌍둥이의 영상은 손에 잡힐 듯 허공에 떠 있는 그 비현실적인
느낌을 통해서 보는 이에게 일종의 퇴행적 환상처럼 다가오며, 그 괴기스런 분열적 신체는 '하나의 순수한 나'라는 우리의 주체개념에 대해 교란으로 작동한다.
이렇게 신체의 이미지를 분열, 다중화시킴으로서 '탈중심화된 주체'라는 포스트모던적 주제를 탐구하는 작업은 이미 매체예술의
발생 초기부터 여러 작가들에 의해 탐구된 바 있는 다양한 작업들의 계보에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예를
들어 피터 캠퍼스(Peter Campus)나 댄 그래함(Dan
Graham)등의 작가들이 비디오 매체를 일종의 '거울복제'로 간주하고, 카메라의 교묘한 위치설정이나 시간지연 등의 방법을 통해, 복제된 자기이미지의 분열이나 주체와의 동일시가 실패하는 과정을 부각시킨 것은 그 고전적 사례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용백의 몇몇 중요한 작업들을 통해 확인되는 바는, 정보의 소통이 아니라
상호변질이, 그리고 매체를 통해 확장, 변질, 분열된 인간의 모습을 부각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의 작업을
보면서 우리는 오늘날 첨단매체 예술이 열어나가는 포괄적 지평을 함께 읽어내게 된다. 그것은 바로, '가상성'이란 것이 이 실제세계의 인식론적 질서에 개입하는 '불순하고 전복적인 이종적 힘'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통찰, 그리고 이것은 우리를 기본적으로 후기 인간적, 후기기계적인 새로운
문화의 지평으로 인도해 가리라는 통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