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철강사를 다루는 박태준기념관에서 3월 12일까지 개최하는 “Metal Fluid: 은반은 뜨거운 빛으로 너울대다”전은 한국을 중심으로 입체 작업을 하며 탄탄한 이력을 쌓아 온 강선미, 강재원, 권오상, 김동해, 변상환, 정소영, 최고은 작가의 작품을 선보인다.
건축물도 감상의 대상이 된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공간과 어우러진 전시가 늘어나고 있다. 2021년 12월 부산 기장군에 세워진 박태준기념관은 철제를 활용한 구조물을 통해 빛과 선을 강조한 공간이다.
철강왕이라고 불리는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을 기리는 이 건물은 상설 전시 공간으로서 젊은 예술가들의 전시, 교육, 공연 등 여러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기념관은 박태준 명예회장의 전기(傳記)뿐만 아니라 철광석의 발견부터 금속성의 탐구 그리고 금속을 소비하는 현대 사회의 모습까지 아우르는 한국 철강 역사를 다룬다.
지난 2022년 12월 20일 개관 1주년을 맞이한 박태준기념관은 스페이스 소의 송희정 큐레이터를 초청해 기념관의 설립 의도에 호응하는 전시 “Metal Fluid: 은반은 뜨거운 빛으로 너울대다”를 개최했다.
3월 12일까지 이어지는 전시는 강선미, 강재원, 권오상, 김동해, 변상환, 정소영, 최고은 작가의 작품을 선보인다. 참여 작가들은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출생해 입체 작업을 하는 작가들로 한국을 중심으로 꾸준한 활동을 펼치며 탄탄한 이력을 쌓아왔다.
해당 전시는 ‘철’을 키워드로 하고 있지만 단순히 단단한 고체 덩어리라는 재료를 중심으로 하지는 않는다. 전시는 철이 갖는 특유의 반짝이는 광택, 두드리면 얇게 펴지는 전성(展性), 가늘고 길게 늘어나는 연성(延性) 등 ‘금속’이 가지는 특성을 다각도로 바라보고 새로운 해석을 더하며 건축물과 조화를 이루는 작품들을 선보인다.
강선미(b. 1977) 작가는 경험한 장소에 대한 감각과 현대 사회에서 발생하는 복잡한 현상들을 기하학적 패턴의 드로잉으로 구현한다. 그는 특히 라인 테이프나 시트지를 활용해 전시 공간의 벽면에 이미지를 그리거나 텍스트를 붙이는 작업을 해 왔다. 그는 관습적으로 사용되는 미술 재료에서 벗어나 전시가 끝나면 사라질 작품을 만들어 크게는 시간의 유효함을 이야기하며, 나아가 현대 사회나 개인적인 삶에서 일어난 다양한 문제를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미래의 과거’는 철의 원재료인 철광석이 가지는 특유의 무늬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기념관의 원형 공간에 그려진 작품은 켜켜이 쌓인 시간과 노력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발생될 결과물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내고 있다.
강재원(b. 1989) 작가는 3D 모델링 프로그램을 기반으로 디지털 조각을 전개한다. 3D 소프트웨어 안에서 조각을 만들고, 조각이 놓인 환경을 구현하며 조명을 렌더링해 조각의 물성을 찾아간다. 화면에 비친 공간 안에서 강재원 작가의 조각은 클릭 한 번으로 이동되고, 이전의 형태로 회복되며, 복제도 이뤄진다. 현실 세계에 구현된 그의 조각은 마치 묵직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 같지만 사실은 가벼운 재료에 공기를 주입하면 되는 인플레이터블(Inflatable)로 제작된다.
강재원 작가는 전통적 조각의 모습에서 벗어나 미래의 조각을 상상하는 작업을 이어 나간다. 우리에게 익숙한 조각은 그 부피와 무게로 인해 어떠한 물질적 특성을 가지며 나아가 이를 감상하기 위해서는 신체를 움직여야만 한다. 하지만 강재원 작가의 작품은 그러한 조각의 특성을 전복시킨다. 해당 전시에서 강재원 작가의 작업들은 얇게 펴지고 늘어나는 전성을 지닌 금속의 질감과 특유의 광택을 발하며 마치 진짜 금속인 듯 서 있기도 하며, 디지털 공간 내에서 현실 세계를 모사하기도 한다.
권오상(b. 1974) 작가는 입체성, 무게, 볼륨감 등 조각의 특성을 다양한 방법으로 실험한다. 권오상 작가는 특정 대상을 수백 번 촬영하여 다시 3차원의 조각으로 만들거나, 잡지나 인터넷의 광고 이미지를 입간판으로 세워 새로운 구도로 사진 촬영한 작업을 제작하기도 한다. 이 입간판 이미지들을 컴퓨터 소프트웨어로 거대하게 확대하여 현실 세계의 조각으로 구현하기도 한다.
이번 전시에서 권오상 작가는 알렉산더 칼더(Alexander Calder)의 스테빌(Stabile)을 연구한 ‘뉴스트럭쳐’ 연작을 선보인다. ‘뉴스트럭쳐’는 광고에서 모은 이미지를 평면성을 그대로 유지한 채 거대 금속판 구조물로 제작한 작업이다. 해당 연작은 새로운 관점에서 조각을 탐구한 거장의 작업을 되돌아보며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오간다.
금속 공예를 전공한 김동해 (b. 1987) 작가는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자연의 풍경에서 영감을 얻어 식물 형태의 오브제를 만든다. 차갑고 딱딱한 금속은 작가의 손길을 통해 유기적 형태와 구조를 갖게 된다. 작가는 식물의 조형적 특징을 탐구하여 금속의 선재와 판재들이 연결되는 기하학적이고 관계적인 구조를 구축한다. 작가는 금속을 단순히 식물의 모습으로 옮겨 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식물의 움직임, 생육 환경과 같은 식물의 생리적 특성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담는다.
“메탈 플루이드”전에서 선보이고 있는 ‘기억의 통로’와 ‘풍경 I’은 금속, 식물, 자연, 환경, 관람자 등 다양한 관계를 아우르며 재료와 사물, 사람 그리고 시공간 사이의 관계를 시각적으로 제시한다.
변상환(b. 1986) 작가는 한국의 일상적인 도시 풍경에서 마주한 대상들을 조각으로 표현할 뿐만 아니라 회화, 조각, 판화 그리고 신체의 움직임을 개입시킨 퍼포먼스적 요소를 작품에 담기도 한다. 그는 도시 내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오래된 사물이나 익숙한 물건들처럼 너무 평범해서 우리가 평소에 인지하지 못하는 대상들을 짚어 낸다. 작가는 그 대상들이 차지하는 공간과 장소를 드러내어 이들의 존재감을 강조함으로써 우리가 당연시했던 정보를 반전시킨다.
변상환 작가의 ‘Live Rust-만자왕(萬磁王)’은 철이 녹슬지 못하도록 방청 페인트를 먹인 적갈색 철제 형강을 여러 장 찍어 낸 작품이다. 각 장의 인쇄물을 자세히 살펴보면 페인트가 만들어 낸 요철이 드러난다. 이런 이미지들이 반복되어 길게 나열된 기하학적 패턴은 3차원의 전시 공간을 점점 장악해 나간다.
정소영(b. 1979) 작가는 우리 사회를 복합적으로 살피며 그 속에 언급되지 않는 이야기와 그 안의 중요한 가치를 읽어 내는 작업을 한다. 그의 장소 특정적 설치, 조각, 영상 작업은 특히 특정 장소에 대한 지질학적·도시학적 조사와 연구를 통해 이뤄진다. 작가는 이를 통해 자연 속에서 도시가 만들어 내는 관계와 변화를 보여 준다. 작가는 땅의 침식과 퇴적 작용을 인간사를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단서로 본다. 이러한 작업은 연구와 상상을 연동하며 물질과 조각의 유연성을 실험하고 물질과 비물질, 인공물과 자연물, 과거와 미래라는 이분법적인 관념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번 전시에서는 마치 방에 굴러다니는 두꺼운 고무줄이나 반쯤 흘러내린 원단같은 형태를 가진 금속 판재 작품을 선보여 철의 견고함을 통해 어떠한 유연한 탄력을 보여 준다. ‘굴러온 길’은 강원도 원주에서 철수한 미군 캠프가 시민에게 개방되면서 설치한 작품으로 한미 동맹과 민간 복지의 경계 사이를 구르는 현대사를 담았으며, ‘항해자’는 시공간이 휘어지는 우주 공간을 상상한 작품이다.
최고은(b.1985) 작가는 냉장고, 밥솥, 에어컨과 같은 가전제품이나 도시의 산업 자재들을 좌대에 올려놓아 일상 사물이 원래 가지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기능을 삭제하고 사물 자체의 순수한 미학적 특성을 강조한다. 작가의 작업은 거대한 시스템의 일부로 작용하는 존재, 자본주의 시장 안에 종속된 사물들의 관계를 끊어 내어 존재들의 의미를 환기한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선베이크’와 ‘트로피’는 수도 설비용 스테인리스 파이프와 동 파이프로 만들어진 조각 작품으로 길쭉한 파이프들이 격렬한 곡선을 그리고 있다. 작가는 보통 건물 바닥이나 벽면 안쪽으로 가려진 파이프의 몸체를 밖으로 꺼냄으로써 사물들의 새로운 조형성을 드러낸다. 또한 이러한 사물들이 우리 사회에 어떻게 존재하는지도 함께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