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Jinju, 'Unseen', 2019, Korean paint on linen, 215.5 x 213 x 6.5(d) cm

일상에서 흔하게 보던 것들이 때때로 꿈에 등장할 때가 있다. 어제 길을 걷다 지나친 공사 현장, 산책하다가 마주친 강아지, 마당에 늘어놓은 화분처럼 너무 익숙한 나머지 꿈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기도 한다. 꿈에서 깨어나면 비로서 그 장면들이 어딘지 터무니없고 기이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진주 (b. 1980) 작가의 그림도 마치 그런 꿈속 같다. 작가는 사물과 인물 하나하나를 한국화 기법으로 매우 사실적이고 정밀하게 표현한다. 하지만 음영이 존재하지 않는 무중력 공간 속에 펼쳐진 이 장면들은 현실 세상의 이치에 맞지 않아 비현실적이다.

마당에서 키울 법한 식물들, 물 줄 때 사용하는 정원용 호스, 쓰러진 비둘기, 구겨진 종이 조각, 각종 도구, 하얀색 가벽 그리고 저마다 다른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인물들은 왜 한 장면에 모여 있는지 알 수가 없지만 왠지 우리가 모르는 어떤 사연이 있을 것만 같다.


Lee Jinju, 'The Lowland (저지대),' 2017, Korean paint on linen, 222 x 550 cm.

이진주 작가는 인물과 일상에서 발견한 사물을 그린다. 그 이미지들은 다양한 생각과 감각이 담긴 작가의 심리적 풍경을 구현하고 있다. 작가는 어릴 적 살던 집처럼 예전 기억의 한 장면을 그리기도 하지만 과거의 트라우마, 가족에 대한 애틋함, 죽음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 기억이 작동되는 방식, 지식과 믿음과 같은 인식 체계에 대한 의문처럼 어떤 현상에 대한 생각과 관념도 사물들로 표현한다.

기억은 시간순으로 질서정연하게 흘러가지 않는 것처럼 그의 회화 작품도 일반적인 논리 구조를 따르지 않아 기묘한 느낌을 준다. 기억은 망각되고 시간을 역행하며, 여러 기억이 혼재하기도 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왜곡되기도 한다. 그림 속 풍경이 기이하고 초현실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작가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기억의 파편들을 모아 새로운 장면으로 엮어 냈기 때문이다.


Lee Jinju, 'hand,wall (손, 벽),' 2017, Korean paint on linen, 53x41cm.

마치 기억과 생각이 무한히 잠재하는 무의식의 공간 속에서 몇 개의 생각을 꺼내 그것에만 구체적인 형태를 부여하듯, 작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러 잔상으로 새로운 장면을 만들어 내며 무대 위에 어질러지듯 화면 위에 펼쳐진다.

그 무한의 공간은 밝은 여백이 되기도 하며 심연과 같은 검정색으로 덮여 있기도 한다. 이진주 작가는 순도 높은 매트한 검정색을 내기 위해 직접 색상을 제작해 ‘블랙 페인팅’ 연작을 제작한다. 해당 연작에서 작가는 배경의 조명을 완전히 끄고 자아를 강조하는 얼굴과 손, 신체의 일부만을 조명하여 또 다른 모습으로 내면을 표현한다.


Lee Jinju, 'The Unperceived(死角, 사각),' 2020, Korean color and acrylic on linen, 122x488cm, 122x 488cm, 122x244cm, 122x220cm

또한 작가는 다층적이고 복잡한 구조를 가진 심리적 풍경을 표현하기 위해 그림 속에 다양한 공간을 만들어 낸다. 마치 투명한 상자에 담은 것처럼 입방체의 형태로 어떤 장면을 그려 넣거나 한 그림 속에 병렬로 늘어선 섬의 형태로 여러 풍경을 표현하기도 한다. 때로는 아예 길게 이어진 회화 작품을 다양한 각도에서 볼 수 있도록 구조물을 만들기도 한다. 작가는 이러한 장치들을 통해 화면과 구조물의 공간 안에 작품마다 고유한 풍경을 담아낸다.

그 고유한 세계는 저마다 다른 장면과 크기를 갖는다. 그 때문에 작가는 그 이미지에 가장 잘 맞는 크기와 비례를 갖는 합판을 제작하여 작업을 한다. 그는 이형사신(以形寫神), 즉 형상으로써 정신을 그린다는 동양화의 철학을 따르지만 한국화의 매체와 기법만을 고수하지는 않는다. 작가의 감각과 기억이 담긴 정경을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재료를 사용하기도 한다.

꿈속 한 장면을 그린 것 같은 이진주의 작품은 이성적인 언어나 현실의 규범 속에서 감추어진 우리의 불안한 실존을 그려 낸다.


Artist Lee Jinju. Courtesy of the artist.

이진주 작가는 아라리오 갤러리의 전속 작가이다. 그는 갤러리현대(2011, 서울), 두산갤러리(2014, 뉴욕), 백아트 갤러리(2017, 로스앤젤레스), 에드윈스 갤러리(2018, 자카르타),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2020, 서울)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또한 국립현대미술관(서울), 주벨기에 한국문화원(브뤼셀, 벨기에), 서울시립미술관(서울), 환기미술관(서울), 일민미술관(서울) 등의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제3회 광주화루 공모전(광주은행, 한국) 우수상, 제14회 송은미술대상(송은문화재단, 서울) 우수상, 제31회 중앙미술대전(중앙일보, 서울) 우수상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천), 서울시립미술관(서울), 경기문화재단(수원), 포스코미술관(서울), 경남도립미술관(창원), OCI미술관(서울), Nesrin Esirtgen 컬렉션(이스탄불, 터키) 등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