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작가 시점이 존재하는 형상계-작가노트

December 16, 2021-January 22, 2022

정수진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는 당연히 실재 파이프가 아니다. 파이프가 아니면 뭘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계와 그림이 존재하는 형상계를 분리시킬 때 얻을 수 있다. 이미 그림은 현실계에 대한 카피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두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그림을 이해하려 할 때 현실계에 대한 각자의 경험을 투영하는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실계를 연상케 하는 그림 속 이미지 뿐만 아니라 추상적 그림 역시 마찬가지다. 소위 추상화라고 불리는 그림은 현실계를 닮은 그림에 대한 상대적 위치에서 이해되고 있는 바, 그 역시 현실계에 대한 경험을 토대로 그림을 인식하는 범위에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밤과 낮, +와 -, 정과 반이 불가분의 한 쌍으로 존재하듯 말이다. 추상이건 구상이건 모두 현실계와는 분리된 세계인 형상계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할 때 마그리트의 그림 속 파이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다. 

LEEEUGEAN Gallery

형상계는 인간의 관념이 이미지로 존재하는 세상이다. 사물이 존재하는 세상이 아니라 사물을 바라보는 수 많은 관점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그러므로 현실계와 닮은 형상도 있지만 현실계와는 아무 상관 없어 보이는 형상도 있다. 닮은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해하는 방식도 다를 수 밖에 없다. 여기서 보는 법, 즉 형상계라는 독특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이 필요해 진다. 그런 이유로 만들어 진 시각 이론이 부도 이론이다. 부도지는 내가 형상계를 부르는 이름이다. 

Exhibition view '전지적 작가 시점이 존재하는 형상계'

이번 전시에서 그림마다 골치 아픈 설명을 붙이진 않을 것이다. 보는 사람들이 그것 까지 이해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래도 보는 사람들을 위한 기본적인 정보는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림이 담고 있는 정보의 종류에 대해서만 간단히 설명하겠다. 

그림이 보여 주는 본질적 대상은 의식 구조다. 의식 구조란 인식 주체가 인식 대상과 맺고 있는 관계다. 이 그림들은 인식 대상과 인식 주체가 만들어 내는 구조들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다. 이론을 적용해서 그림을 그렸다 해서 그림을 보는 사람이 그것을 당장 알아챌 수는 없다. 한글을 배우지 않은 사람들이 한글로 쓰여진 소설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낯선 것은 언제나 기피의 대상이 된다. 어려운 건 익숙하지 않아서 이기도 하다. 아직까지 그림, 즉 형상계의 언어는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낯선 언어일 뿐이다. 지금까지 그림을 보던 습관을 모두 배제하고 새롭게 그림을 보라고 요구하는 일은 사실 나 자신에게도 벅찬 일이다. 나 역시 연습이 필요 했고 아직도 그렇다. 평면이란 인식된 관념이 투영되어 이루어진 모든 개념적 장소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평면의 차원은 2차원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평면에 투영된 인식의 차원에 의해 결정된다. 공상 과학 소설과는 달리 새로운 차원의 세계는 인식의 변화를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다. 인식은 우리가 차원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형상계에 있는 수 많은 관점은 다양한 차원에서 세상을 해석하게 한다. 그림에는 바로 그러한 다른 차원의 세계를 경험하기 위한 단서가 있다. 인간의 몸과 마음은 감각으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감각적 인식을 한다. 그림에 있는 다양한 표면질감과 붓질은 보이지 않는 의식 활동에 대한 감각적 표상으로 감각적 인식을 위한 단서로서 작동한다. 

Exhibition view '전지적 작가 시점이 존재하는 형상계'

나의 그림은 생각, 감정, 느낌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생각, 감정, 느낌의 배후에 있는 구조에 대한 표현이다. 그리고 이 구조들은 차원의 구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