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을 ‘나’를 온전히 만나게 하는 사진이 있다. 사진 속 ‘무엇’을 명시하기보다 그 ‘무엇’과 ‘나’의 관계를 주시하는 사진이다. 그 ‘무엇’이 사물이거나 풍경일 때, 관계를 주시하는 것은 오롯이 ‘지금’의 ‘나’다. 바라보는 시선이 나에게 있기에, 의미의 빈자리를 채워가는 것도 내 몫이다. 이런 사진 앞에서 ‘나’는 늘 현재의 ‘나’와 마주할 수밖에 없다. 과거의 ‘그 때’나 미래의 ‘그 날’에 쫓겨 무수한 ‘현재’로부터 끝없이 달아나는 ‘나’를 멈춰 세우는 ‘비어 있는 순간’이다. 모든 것의 빈자리에는 침묵이 자라고, 침묵은 밑바닥까지 실재의 실체를 들춰낸다.
정경자의 <조용한 날들Serene Days>은 코로나19의 팬데믹 속에서 강요된 침묵으로 갑갑한, 합의된 거리두기로 소원한, 이 소란스러운 고요 속에서 인간으로서 ‘나’를 들여다보게 한다. 힘과 기술로 모든 것에 경계를 지으며 직진해온 문명이 주춤하는 사이,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나’와 ‘우리’를 만나게 한다. 작가는 가리고, 막히고, 닫힌 인간의 공간과 변화하며 순환하는 열린 자연을 보여준다. 또 자연의 일부임에도 자연을 욕망하고 소유하려는 인간의 흔적을, 거대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치부되는 일상의 시공간 속에서 스냅사진으로 잡아챘다. 스쳐 보내는 사물과 세계를 남다르게 분절해 드러내는 시선과 일련의 사진을 엮어 보여주는 이야기 방식으로 사진을 바라보는 시선을 낚아챈다.
“거울 속의 거울(spiegel im spiegel, 2000)”시리즈부터 최근작 “Nevertheless”(2021) 시리즈까지 정경자는 사진에서 ‘나’를 잃어버린 적이 없다. 내가 느끼고 감각하는 것에 카메라의 시선을 멈추고, 그것의 의미를 규정할 수 없어도 셔터를 누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사회보다 ‘개인’에 초점을 맞추었고, 웅장한 사건보다 무심한 사물에, ‘영원’이라는 꿈보다 인간의 유한한 시간에 주의를 기울였다. 존재의 소멸을 받아들이기에 어제의 기억이나 내일의 기대가 아닌 오늘의 ‘현재’에 집중했다. ‘현재’는 매 순간이기에 변하지 않는 관계도, 고정된 의미도 없다. 촬영할 때도, 사진을 볼 때도 다만 그 순간 순간의 ‘나’를 만날 뿐이다.
의미는 모호하지만 또렷하게 감각하게 하는 이미지로 작가는 나만의 사전을 만들어, 전시 때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사진을 꺼내 이야기를 펼쳐 보였다. ‘나’와 일상 속 사물과의 관계에 주목한 (2013), 일상의 시간과 죽음의 관계를 주시한 (2015)시리즈에서는 두서너 장의 낱장 사진으로 문장 하나하나를 구성했다. 그리고 개인과 도시 공간의 관계에 주의한 (2016)에서는 두 장의 사진을 한 장의 파노라마 사진으로 편집해 하나의 문장을 만들기도 했다. 여느 사전과 다른 점은 정경자의 사전은 세계를 ‘정의’하지 않으며, 다만 그 세계로 이끈다는 것이다.
전시 <조용한 날들>은 불안과 공포를 확산하는 요즘의 팬데믹을 자연의 시간으로 바라본 “Nevertheless”시리즈에, 25년을 끝으로 사라진 인간의 공간인 한 호텔에서 인간이 아닌 그 공간의 기억을 수집한 “So, Suite”(2019)시리즈의 작품을 발췌해 엮었다. 그리하여 예상치 못한 시련에 요동치는 인간의 시간을 의연한 자연의 시간으로 바라보고, 소멸하고 마는 인간의 공간에서 영원과 자연을 향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인간의 욕망을 좇는다. 팬데믹 시기 지금의 일상 속 ‘나’의 이야기로 시작해, 자연의 생명체로서 유한한 인간의 행위가 자연과 모든 생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세계’의 성찰로 이어진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하는 것은 실내에서 추위에 한껏 움츠러든 고무나무 사진이고, <조용한 날들>의 이야기는 문의 길이보다 한참 길어 접힐 수밖에 없는 커튼이 달린 닫힌 창 사진으로 나아간다. 전시장을 빠져나가는 길목에 내걸린 비등한 크기의 두 장의 사진에서, 설산은 낮에 빛나고 산업의 인공 불빛은 밤을 밝힌다. 명확한 감정을 투영할 수 있는 인간도, 뚜렷한 내러티브를 발견할 수 있는 사건도 있지 않다. 공간 내부의 사물이 닫힌 세계로 이어지고, 높은 산과 넓은 바다가 실내의 작은 풍경화 속 자연과 부딪히며, 식물원 안에 갇힌 초록의 생명체는 밖이 비치는 온실의 유리와 철근을 뚫지 못한다.
작가는 전시에서 “Nevertheless”와 “So, Suite”시리즈를 구분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굳이 따져 살펴보자면 자연의 실재와 관계한 장면이 “Nevertheless”시리즈이고, 자연을 모방한 인공의 실재와 관계한 장면이 “So, Suite”시리즈이다. 자연과 인공이 크고 작게 혼재하는 <조용한 날들>은 자연을 분리해가며 영역을 한없이 넓혀가는 인간의 문명과 분위기가 닮았다. 자연을 추구하지만 멀어지고, 모방하면서 훼손하고, 일부이면서 전체를 지배하려 한다. 지구의 모든 종과 연결된 인간이 하나의 세계를 두 개로 나눈 세계이고, 그럼에도 인간의 영역은 자연의 일부일 수밖에 없는 유한한 세계이다.
“Nevertheless”시리즈의 자연 세계는 흔들리는 벚꽃과 낙엽을 떨군 나무, 흰 눈을 털어내는 겨울 산과 파도가 멈추지 않고 밀려 오가는 바다, 그리고 하늘을 포함한다. 모든 것은 제자리에서 제 것 하나 없이 시간에 따라 비우고 채우기를 반복하며 변화한다. 반면 “So, Suite”시리즈의 인간 세계는 벨벳을 입힌 가구와 커튼으로 번쩍이고, 카펫을 씌운 벽과 바닥이 공간을 구획한다. 벨벳과 카펫이 자연의 털을 모방한 인공의 산물이라면, 표백된 시트나 광택 나는 가구 언저리에 있는 화분과 자연의 풍경화는 식물과 생물을 유리 온실과 병에 가둬 소유하려는 욕망의 전시물과 다르지 않다.
“Nevertheless”와 “So, Suite”시리즈에서 각각 선별한 사진은 이전 전시들의 방식과 달리 다양한 크기의 낱장 사진으로 하나의 긴 문장을 만든다. 거대한 자연은 작은 사진으로, 자연의 일부는 큰 사진으로 확대돼, 일상에서 인간이 보는 시각의 원근에서 벗어난다. 또 인공의 공간으로서 수십 년 동안 일회적인 기억을 축적해간 ‘호텔’과 포획한 자연을 키우는 투명한 온실의 풍경은 그것이 품은 큰 욕망과 달리 축소됐다. 빛깔을 뺀 자연은 회상처럼 다가오고, 색깔을 띤 인간의 공간은 공상처럼 떠돈다. 어떤 사진은 그렇게 단어가 되고, 어떤 사진은 쉼표가 되기도 하지만 어디에도 온점과 같은 마침표는 없다.
전시 <조용한 날들>은 불안과 공포를 확산하는 요즘의 팬데믹을 자연의 시간으로 바라본 “Nevertheless”시리즈에, 25년을 끝으로 사라진 인간의 공간인 한 호텔에서 인간이 아닌 그 공간의 기억을 수집한 “So, Suite”(2019)시리즈의 작품을 발췌해 엮었다. 그리하여 예상치 못한 시련에 요동치는 인간의 시간을 의연한 자연의 시간으로 바라보고, 소멸하고 마는 인간의 공간에서 영원과 자연을 향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인간의 욕망을 좇는다. 팬데믹 시기 지금의 일상 속 ‘나’의 이야기로 시작해, 자연의 생명체로서 유한한 인간의 행위가 자연과 모든 생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세계’의 성찰로 이어진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하는 것은 실내에서 추위에 한껏 움츠러든 고무나무 사진이고, <조용한 날들>의 이야기는 문의 길이보다 한참 길어 접힐 수밖에 없는 커튼이 달린 닫힌 창 사진으로 나아간다. 전시장을 빠져나가는 길목에 내걸린 비등한 크기의 두 장의 사진에서, 설산은 낮에 빛나고 산업의 인공 불빛은 밤을 밝힌다. 명확한 감정을 투영할 수 있는 인간도, 뚜렷한 내러티브를 발견할 수 있는 사건도 있지 않다. 공간 내부의 사물이 닫힌 세계로 이어지고, 높은 산과 넓은 바다가 실내의 작은 풍경화 속 자연과 부딪히며, 식물원 안에 갇힌 초록의 생명체는 밖이 비치는 온실의 유리와 철근을 뚫지 못한다.
작가는 전시에서 “Nevertheless”와 “So, Suite”시리즈를 구분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굳이 따져 살펴보자면 자연의 실재와 관계한 장면이 “Nevertheless”시리즈이고, 자연을 모방한 인공의 실재와 관계한 장면이 “So, Suite”시리즈이다. 자연과 인공이 크고 작게 혼재하는 <조용한 날들>은 자연을 분리해가며 영역을 한없이 넓혀가는 인간의 문명과 분위기가 닮았다. 자연을 추구하지만 멀어지고, 모방하면서 훼손하고, 일부이면서 전체를 지배하려 한다. 지구의 모든 종과 연결된 인간이 하나의 세계를 두 개로 나눈 세계이고, 그럼에도 인간의 영역은 자연의 일부일 수밖에 없는 유한한 세계이다.
“Nevertheless”시리즈의 자연 세계는 흔들리는 벚꽃과 낙엽을 떨군 나무, 흰 눈을 털어내는 겨울 산과 파도가 멈추지 않고 밀려 오가는 바다, 그리고 하늘을 포함한다. 모든 것은 제자리에서 제 것 하나 없이 시간에 따라 비우고 채우기를 반복하며 변화한다. 반면 “So, Suite”시리즈의 인간 세계는 벨벳을 입힌 가구와 커튼으로 번쩍이고, 카펫을 씌운 벽과 바닥이 공간을 구획한다. 벨벳과 카펫이 자연의 털을 모방한 인공의 산물이라면, 표백된 시트나 광택 나는 가구 언저리에 있는 화분과 자연의 풍경화는 식물과 생물을 유리 온실과 병에 가둬 소유하려는 욕망의 전시물과 다르지 않다.
“Nevertheless”와 “So, Suite”시리즈에서 각각 선별한 사진은 이전 전시들의 방식과 달리 다양한 크기의 낱장 사진으로 하나의 긴 문장을 만든다. 거대한 자연은 작은 사진으로, 자연의 일부는 큰 사진으로 확대돼, 일상에서 인간이 보는 시각의 원근에서 벗어난다. 또 인공의 공간으로서 수십 년 동안 일회적인 기억을 축적해간 ‘호텔’과 포획한 자연을 키우는 투명한 온실의 풍경은 그것이 품은 큰 욕망과 달리 축소됐다. 빛깔을 뺀 자연은 회상처럼 다가오고, 색깔을 띤 인간의 공간은 공상처럼 떠돈다. 어떤 사진은 그렇게 단어가 되고, 어떤 사진은 쉼표가 되기도 하지만 어디에도 온점과 같은 마침표는 없다.
작가는 오늘의 팬데믹을 마주하는 시선을 ‘조용한 날들’이라는 제목으로 내보였다. 두려움이 깃든 적막처럼 세계가 격동하며 숨죽이는 날들에 대한 반어이자, 팬데믹 이후 인간에게 펼쳐질 ‘조용한 날들’에 대한 물음이다. 희망을 앞세워 긍정하거나 절망에 부러져 부정하듯 평가하기보다 움츠리다 펼치고, 닫혔다가 열리고, 갇혔다 풀어지는 반복되는 양상만 제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설되는 것은 제 자리에서 다만 변화하는 자연처럼 의연하게 사태를 바라보고자 하는 ‘물러남’이고, 쏟아지는 공포와 두려움, 그로 인한 불안과 불신을 가라앉히고 잠시 침묵할 수 있는 빈자리를 ‘내어줌’이다.
<조용한 날들>의 전시에서 또는 작품을 담은 사진집에서 작가의 사진을 바라보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은 없다. 다만 하고자 한다면 나와 사진의 경계를 트고 작가가 내어준, 그 의미의 빈자리로 들어설 수는 있다. 혹자는 인류의 역사에서 팬데믹은 반복되었고, 오늘날 역시 스쳐 가는 무수한 현재일 뿐으로 여길 수 있다. 또 다른 혹자는 현대 문명이 광란하듯 파괴해가는 생태 환경과 자연의 면전에서 인간이 맞은 경고로 팬데믹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 물론 정답은 알 수 없고, 누구도 이 팬테믹 이후의 세계에 대해 확언할 수 없다. 그렇기에 침묵함으로써 ‘지금’을 함께 직시해볼 뿐이다.
모든 것은 존재하는 자리보다 비어 있는 자리에서 그 실재의 실체를 만날 수 있다. 비우기보다 채우기를, 빈자리보다 채운 자리를 원하는 우리가 설사 그 순간 ‘현재’로부터 무한히 달아나는 ‘나’만 확인할지라도, 그것은 성찰의 시작으로서 실체의 현재이다. 그리고 일시에 부닥친 시련으로부터 달아나지 않고 사태를 직면해 통찰하면, 알려 하지 않기에 알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변질하기보다 변화하고 전환할 수 있다. ‘현재’로부터 무작정 달아나도 다음 순간이 다시 ‘현재’이며, 또 달아날 수 있다고 기대하는 ‘미래’ 따위는 확신할 수도 없다. 살아가는 방법은 ‘지금’의 나약한 ‘나’를, 취약한 ‘세계’를 늘 파고드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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