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한 반복이 만드는 섬세한 차이

October 1, 2021 - October 24, 2021

김성홍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

1989년 해외여행이 전면 자유화되기 이전 학생들이 세계 건축을 접할 방법은 글과 흑백사진뿐이었다몇몇 여행가들이 낸 세계여행 컬러 화보집이 해외 도시의 풍경을 접하는 최고의 통로였다그때 해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젊은 교수들이 보여준 거장 건축가들의 작품은 가슴을 뛰게 했었다교수연구실 책장에 꽂혀있었던 슬라이드 파일은 학술적 권위를 의미했다. 1990년대 들어서서 건축가들은 그룹을 지어 건축을 탐방하러 해외로 나갔다어깨는 무거운 카메라가 걸려있었고배낭에는 수십에서 수백 통의 슬라이드 필름이 들어있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새로운 여행지에서 카메라를 꺼내는 건축가는 별로 없다스마트폰으로 스냅 사진을 찍는 것이 전부다정년을 앞둔 선배 교수연구실에서 미처 스캔하지 못한 수천 장의 이미지들이 슬라이드 파일 채로 쓰레기통으로 버려지는 것을 본다국내외 할 것 없이 마찬가지다슬라이드든 디지털 파일이든 이미지를 소장하고 있다는 것이 더는 권위가 아니다엄청난 양의 이미지가 인터넷을 통하여 유포되고 있다아프리카와 남미에서 준공된 신작 도면과 이미지를 담은 웹진이 매일 스마트폰을 통해 배달된다차단하려고 마음을 먹지 않는 이상 이미지와 정보는 우리의 일상을 에워싸고 있다.

나는 도면역사 기록통계를 재료로 삼아 도시와 건축을 공부하고 있다하지만 분석적 연구보다 직관적으로 포착한 사진 한 장을 통해 우리는 도시의 실체에 즉물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그래서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책에 들어갈 사진을 찾기 위해 이메일을 보내고전화하고발품도 판다저작권 문제 이전에 글과 숫자로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의 세계를 시각적 형태로 투사한 한 컷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기술복제시대’를 거쳐 디지털시대에 와 있지만사진의 ‘유일성’과 작가의 ‘아우라’는 여전히 살아있다.

Park Chanmin, 'CTS 06_OSA,' 2015, Digital Pigment Print, 100 x 130 cm

박찬민의 새 전시 <We Built This City (2021)> <Intimate City (2008)>, <Untitled (2013)>, <Urbanscape: Surrounded by Space (2015)>, <Blocks (2015)> 에 이은 일련의 도시(Cities) 작업이다건축학자의 눈으로 본 박찬민의 사진은 자연이 뒤로 물러나 있는 도시의 중경(中景)이다. 3점 투시도 효과를 최대한 배제하기 위해 올려다보는 도시 표면과 내려다보는 조감도의 중간지점을 카메라의 소점으로 잡았다시점은 길게 드리운 그림자두드러진 명암산광이 생기지 않는 정오 무렵이다스펙터클극적 분위기이벤트찰나적 장면을 배제한 망원렌즈로 포착한 무표정한 도시 풍경이다그리고 표피의 디테일이 지워진 건물은 육중한 매스로 남는다마치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서 사람들을 지워버린나른한 정오의 초현실적 도시공간을 보는 것 같다.

박찬민은 근대예술의 저변에 깔린 ‘감정적 혹은 가치의 중립성’이라고 이를 표현했다근대주의 이전의 회화조각건축의 의미는 형태와 형식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전달하고자 하는 무엇이었다근대 프로젝트는 기의(記意)와 기표(記標)의 관계를 전복했다예술은 예술 외적 무엇을 표상하지 않는다형식과 형태의 구성적 논리질서법칙이 있을 뿐이다예술 작품의 가치는 전달하는 매체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에 있다하지만 이는 예술 작품이 의도의미표상하지 않는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창작자가 심어 놓은 하나의 서사구조와 하나의 해석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뜻이다주체와 객체 간의 일방적 관계가 다층적상호적 관계로 열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작품 앞에 서 있는 우리에게 난해한 이론과 지식은 습득해야 할 전제조건이 아니다우리는 분석하고 해석한 후 감탄사를 내뱉지 않는다반응은 직관적이고 동시적이다논리의 세계 이전에 느낌의 세계에서 먼저 교감하기 때문이다분해하고 분석할 수는 없지만박찬민의 사진에는 시선을 고정하고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다불필요한 것들을 소거하고 남은 중성의 아름다움이다..

Park Chanmin, 'CTS 15_SEL,' 2018, Digital Pigment Print, 100 x 130 cm

사진집 <Blocks (2015)>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위도가 높고태양이 작열하지 않고습도가 높은 영국의 소도시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다하늘 색깔건물과 길의 표면을씨년스러운 자연인적이 드문 길모퉁이 풍경 때문이다반면 <Urbanscape: Surrounded by Space (2015)>의 고층건물 숲은 홍콩인지도쿄인지서울인지 쉽게 분간하기 어렵다창과 문을 지운 사진은 더욱더 그렇다.

지난 100년간 모더니즘을 전 세계에 유포한 원산지보다 아시아의 도시가 더 근대적이라는 사실은 역설이 아닐 수 없다서울과 에든버러에서 사진을 배운 박찬민에게 ‘동양적 판타지’보다 아시아 도시의 같음과 미세한 차이가 더 현실적인 주제였을 것이다사진에서 드러난 동아시아 세 도시의 고층건물 매스와 실루엣은 놀랍도록 비슷하다벽면 타일글자에어컨 실외기계단 난간과 같은 디테일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이는 동아시아 도시 간의 진정한 차이는 거대하고 과시적인 랜드마크나 아이콘이 아니라 자잘한 디테일에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서울이 유럽 도시가 될 수 없고될 필요도 없다는 것을 박찬민의 사진은 말하고 있다.

몇 장의 사진그림책으로 스타가 될 수는 있지만그들을 작가라고 부르지 않는다작가는 지루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반복을 감내하는 사람들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저자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에서 스승은 젊은 지망생에게 묻는다“출판을 거부당하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이 작가의 첫걸음이다평생 출판을 못하더라도 글을 쓸 것인가?” 너무나 가혹한 질문이다글을 쓰고그림을 그리고사진을 찍은 일은 누군가와 공감하기 위해서다하지만 직업으로서 생존해야 한다‘공감’을 향한 열망과 ’생존’을 향한 몸부림은 종이 한 장 차이지만종이 앞뒤에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영화는 두 세계를 마지막 장면까지 끌고 간다.

Park Chanmin, 'CTS 05_HKG,' 2016, Digital Pigment Print,130x170cm.

유튜브 조회 수와 인스타 감성이 압도하는 지금상업사진이나 다큐멘터리와 거리를 둔 사진작가의 삶은 외롭고 위태롭다그래도 매일 작업실에서 사전 리서치를 하고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갈 수 있게 하는 동력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생각을 하지 않는다‘ 라는 박찬민의 답이 돌아왔다지루한 반복 작업으로 밥을 먹는 장인들은 머리로 생각하지 않는다무게와 깊이는 주어진 것을 감내하면서 치열하게 살았던 인간의 궤적과 작품이 하나의 서사를 이룰 때 생겨난다고 믿는다박찬민의 십여 년간 이어온 도시작업 역시 그만의 서사를 만들어 가는 지루한 반복의 노정(路程)일 것이다.

이번 전시 < We Built this City >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작품은 도시를 바라보는 박찬민의 관점이 더 과감해지고 내밀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대상은 동아시아에서 우리 도시로 좁혀진 반면더 위에서더 멀리서 도시를 조망하고 있다건물바다도로다리고가도로조경을 아우르는 도시 풍경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현대 도시는 욕망경쟁갈등절충의 집합체이다박찬민은 더 깊고 예리하게 이를 해부해 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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