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인터넷에 한동안 떠돌던 밈(meme)이 있다. 스위스 사람들이 한글 ‘스위스’를 보고 마치 산속에 창 들고 서 있는 용병이 떠오른다며 매우 신기해 하는 내용이다.
정수진(b. 1969) 작가의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쩌면 한글을 모르는 스위스인의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한글을 순수하게 시각적인 대상으로 보는 스위스인들처럼 말이다.
정수진 작가의 회화 작품은 중력과 원근이 사라진 평평한 공간을 구현한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개성이 없으며, 그들 간에는 특별한 관계성도 보이지 않는다. 그림 속에는 일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물건들과 어디선가 본 적 있는 듯한 배경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마치 엉뚱한 물건이 가득한 초현실주의 작품처럼 그림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모티프들은 자유롭게 배치되어 있으며, 때로는 해체된 모습을 하고 있다.
많은 사람은 정수진 작가의 회화 작품을 보며 작가가 숨겨 놓았을 의미가 있을 거라 여기고 이를 풀어내고자 한다. 하지만 작가는 작품에 무언가를 재현하지 않았다. 그림은 순수하게 시각적인 대상일 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러 가지 대상을 묘사한 구상화 같지만 작가는 색과 형태의 조합으로써 어떠한 형상을 만들었을 뿐이다. 작가가 캔버스의 평면 속에 표현하고자 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의식이 내재된 다차원적 세계이다.
작가는 색과 형태의 조합을 통해 회화의 본질적 대상 즉, 의식 구조를 탐구한다. 따라서 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한 이미지는 작가가 구축한 원칙과 구조를 기반으로 한다.
정수진 작가가 바라보는 세계는 현실계와 형상계로 나뉘어져 있다. 각각 외부의 실존하는 세상과 우리의 눈을 통해 보이는 주관적이면서도 다양한 관념으로 만들어진 세상이다. 이 둘은 서로 다른 세상이다. 한마디로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은 수많은 개개인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관점으로 만들어졌다.
그 세상 속에는 현실계와 닮은 형상도 있지만 현실계와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이는 형상도 존재한다. 따라서 이러한 형상들을 이해하는 방식은 각자 투영하는 경험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작가는 우리가 작품을 감상할 때 현실계와 현상계가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해야만 진실을 마주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작가는 자신의 방법론인 ‘부도(符圖) 이론’을 책으로 펴내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지식과 습관을 모두 버리고 순수하게 시각적인 관점에서 그림을 바라보도록 한다. 이 책에는 64개의 형상 코드와 64개의 개념 코드가 소개되어 있는데, 이는 인간의 무의식에 내재된 다차원적 세계의 논리를 읽는 방법을 설명한다.
정수진 작가의 그림은 생각, 감정, 느낌의 이면에 내재된 어떠한 의식적 구조에 대한 표현이다. 정수진 작가는 작품을 볼 때 순수 조형적 회화인 것으로 “읽지 말고 보라”고 권유한다.
정수진 작가는 1999년 첫 개인전을 가졌고 이후 수많은 개인전을 열었다. 2006년 국내 작가로는 처음으로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 지점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가장 최근인 2021년에는 이유진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정수진 작가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천), 문예진흥원(서울), 연강재단 두산아트센터(서울), 선화예술문화재단(서울), 롱 뮤지엄(상하이, 중국) 등 다수의 미술 관련 기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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